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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츠키] 동거인

총편집본 (본편)


 

1.

 

 

 

일찌감치 점심을 해치웠다. 후식까지 배불리 먹고 나니 금세 노곤해졌다. 바깥 공기는 차고 교실은 뜨끈했다. 오래 묵은 커튼의 먼지가 겨울이라 더욱 환한 햇빛 속에서 부유했다. 학생들도 다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가을 학기 마지막 무렵 특유의 붕 떠 있는 느낌. 점심시간을 몇 분 남겨놓지 않은 시각, 빈 자리들이 듬성듬성 있는 교실의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창가 자리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으니 몽롱하게 경기 장면들이 흘러갔다.

‘봄고에서의 마지막 세트업, 정말 기분 좋았지.’

교실 안의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기억 속의 함성 소리와 뒤섞였다. 덩어리로 뭉친 소리가 뭉게구름처럼 귓가로 내리 앉았다. 기분 좋은 포만감과 몽롱함에 금세 나른한 졸음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가고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잠시 헤매며 넘어갈락 말락 할 무렵, 낮고 명료한 목소리가 툭 귓가를 치며 경계를 허물고 쳐들어왔다.

“야.”

잔뜩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언제 봐도 허여멀건 녀석이 책상 옆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절로 튀어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하고 기지개를 쭉 켰다.

“왜.”

언제나처럼 불퉁하게 말을 걸어온 녀석은 되묻는 말에 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왜.”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해도 눈을 내리깔고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삐쭉빼쭉하는 것이 정말 이상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할 말 없으면 가. 잘 거야.”

“어차피 맨날 자면서 뭘 더 잔대.”

“왜 또 시비야. 용건 없으면 가.”

한숨 자면서 소화시키고 체육관 가야지, 본격적으로 자볼까. 팔을 포개 엎드렸다. 녀석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이 녀석 답지 않게 왜 이래, 의아해 고개만 돌려 슬쩍 올려봤다. 말간 이마 위로 짧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삐쭉이던 입술을 풀어 한숨을 한 번 푹 내쉬더니 세상 다 끝났다는 듯한 해탈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진짜 같이 살 거야?”

“…하아?!”

센터 시험도, 본고사도 거의 다 끝나고 학교에 나오는 3학년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다들 나른해질 대로 나른해진 늦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 이게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같이 살라니?!”

- 얘, 토비오, 귀 아파. 소리 지르지 말고. 내가 말 안 했었니?

“‘말 안 했었니’ 라니?! 아니,”

- 아, 엄마 지금 회의 들어가야 돼, 이따 집에서 얘기하자. 이따 봐~

“잠…!”

이쪽에서 뭐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툭 끊겼다. 손 안에 든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 굳어버린, 카게야마 토비오, 카라스노 고교 3학년, 졸업 예정자, 도쿄의 C대 스포츠 추천 진학 예정,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에,

끼익-

“밖에서 다 들리거든?”

저기 서 있는 츠키시마 케이의 동거인으로 지정된 사람.

정말 기운도 좋아 제왕님은, 다 들리는 혼잣말을 입가에 매달고 츠키시마가 부실도 걸어 들어왔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상황 파악도 다 안 된 터라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이 녀석과의 침묵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딱히 없었는데 괜히 할 말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야마구치는?”

“오늘 오후에 합격 발표 난다고 대기 중.”

1월의 봄고에 곧바로 이은 센터 시험,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본고사들에 진학반인 츠키시마와 야마구치, 야치는 그동안 얼굴을 내비치지 못 했다. 센터 시험만으로 무난히 합격선이라는 소리가 들리던 츠키시마가 가장 먼저 합격 소식과 함께 학교에 다시 파리한 얼굴로 나타났다. 야치도 무난히 합격, 야마구치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3학년들의 가정학습기간이 이어져 사실 학교에는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었지만 대학의 프리 훈련 기간까지도 시간이 남아 부활동이나 더 할 생각으로 매일같이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체육관에 다시 얼굴을 내비친 건 조금 의외긴 했지만 함께 블록을 뛰는 것도, 후배들을 갈구는 목소리도 오랜만이라 나름 즐겁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츠키시마의 어머니와 엄마가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스포츠 추천 입학이 가능할 것 같았던 학교들 중 후보로 올려놓은 곳은 도쿄의 사립대학, 그 중에서도 대학 리그에서 몇 번씩이나 우승했던 전력이 있었던 C대와 H대 등이었다.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도쿄의 대학에서 여러 스파이커들과 플레이해보고 싶습니다.’

대학 진학에 대한 생각을 안 하고 있었을 때에도 타케다 선생님은 지금 카게야마 군이 하는 부활동이 즐겁다면 대학에 가서 하는 배구도 즐거울 수 있을 거라며 생각을 미리부터 닫아놓지 말라며 조언해주었다. 차츰 관심이 생길 때쯤 대학 리그에 대한 것들도 조사해주었다. 목표로 한 대학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선생님은 현실적인 말 대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타케다 선생님께 특별 진로상담을 받는다고 엄마가 학교에 왔던 초여름의 어느 날, 츠키시마,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알고 보니 츠키시마가 염두에 두고 있던 대학들 중에도 C대가 있었다. 주욱 팀메이트로 있었지만 부모님들끼리 만나는 건 처음인지라 어색해할 법도 했는데, 두 분은 금세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결국 근래 몇 년간 대학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국가대표 선수들도 있는 C대의 스포츠 추천 입학이 결정되었고, 그 뒤를 잇듯 츠키시마도 1, 2 지망에 무난히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연락을 주고받던 두 분이서 ‘축하드려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축하드려요’부터 시작해서 ‘타지에 보내는 게 불안했는데 둘이 같이 지내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월세도 아낄 수 있고.’ 등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기억을 한참 뒤져 대입 공부로 점점 핼쑥해지던 츠키시마와 야마구치가 하굣길 상점가 앞에서 나누던 대화의 일부분을 겨우 건져 올렸다. “너 1지망은 T대 아니었어?”

“장학금 받을 수 있으니 문과대가 강한 쪽으로 가고 싶어서.”

가방을 뒤적거리고 서 있는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고 의심 가득한 말을 던졌지만 돌아온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츠키시마 녀석과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3년간 팀메이트로 지내면서 나름 지낼 만해졌다. 처음에 스가와라 씨가 ‘정면으로 커뮤니케이션하라’고 했을 때나 엔노시타 씨가 ‘단순한 녀석은 아니니까’라고 했을 때야 ‘???’이었지만 그래도 함께 한 시간동안 익숙해지고 서로 변해간 부분이 있다. 얄미운 면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팀원으로서 신뢰할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우스메이트라니, 난감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짜증이 나 한참동안 서서 괜히 가방을 헤집고 있으니 녀석이 슬쩍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라고 또 얄미운 말을 날리겠지. 이제는 심지어 타이밍마저 대충 짐작이 된다. 셋, 둘, 그리고 하나.

“먼저 간다.”

어라? 슬쩍 돌아보니 녀석은 저지 지퍼를 주욱 올리며 부실 문을 열고 나섰다. 바깥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욥! 츠키시마, 카게야마~!”

“시끄러워 멍청히나타!” 춥다고 야단을 떨며 시끌벅적하게 들어오는 히나타를 보자 뭔가 스멀스멀 돌던 찜찜한 기분이 튀어나와 버럭 큰 소리를 내 버렸다.

“엑, 뭐야 얼굴 보자마자.”

츠키시마는 쿡 웃으며 히나타의 등 뒤에 대고 뭐라 웅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

 

“엄마아!!!”

“아우 토비오, 귀청 떨어지겠다.”

느지막히 퇴근한 엄마가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붙잡고 묻기 시작했다.

아니, 보아하니 너랑 츠키시마 군이 캠퍼스도 같은 곳이고, 게다가 3년 동안 같은 팀으로 지냈고, 무엇보다 츠키시마 군은 똑똑하잖아? 아무리 스포츠 추천 입학이라지만 그래도 유급당하거나 하면 안 되잖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낙제 받을 뻔한 거 공부 가르쳐준 것도 츠키시마 군 아니었어? 같이 지내면서 공부도 좀 배우고 그럼 되잖아. 어차피 투룸으로 얻어서 같이 월세 내면서 지내면 타지에서 외롭지도 않고 적당히 자기 공간도 있고. 츠키시마 군, 전에 보니 쿨한 타입이던데, 같이 지내서 딱히 불편할 게 뭐가 있겠니. 네 일이야 네가 지금까지 알아서 잘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이제부턴 쭉 도쿄에서 지내게 되는 거잖아. 지금이야 네가 독립할 생각에 좋을지 몰라도 혼자 사는 게 그렇게 좋기만 한 일이 아닐 거야, 토비오. 고등학교 동창에 똑똑한 팀메이트가 같은 지역, 같은 대학 캠퍼스로 진학한다니 오히려 좋아할 일이잖니. 너는 왜 츠키시마 군이랑 같이 지내기 싫어? 사이가 안 좋니?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며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엄마 뒤를 쫓아다니며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엄마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고 마지막 질문에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물론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러면 왜 같이 지내기 싫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리던 엄마가 눈을 지그시 맞춰오며 그렇게 물어오자 말문이 막혔다.

왜 같이 지내기 싫지? 음, 같이 지내기 싫은 거였나?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갑작스런 통보와 한숨 섞인 ‘진짜 같이 살 거야?’라는 질문에 츠키시마와 하우스 쉐어하는 게 좋은지 싫은지 생각해볼 틈도 없었다. 싫은 건가, 싫은 거면 이유가 뭐지.

대답이 없자 엄마는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고 일어섰다.

“잘 생각해보렴.”

머릿속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나는 왜 츠키시마와 하우스 쉐어하고 싶지 않은가.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아서? 애초에 내가 그렇게 예민한 사람도 아니고 합숙할 때도 낯선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잘만 했다. 예민한 걸로 따지면 오히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깊게 잠들지 못 하는 츠키시마가 훨씬 예민하면 예민했지 적어도 나는 아니다. 중고등학교 배구부, 유스 합숙, 이미 공동생활은 익숙하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같이 연습하고 밥 먹고 잘 잔다. 이건 PASS.

그 녀석이 얄미운 소리를 해대서? 하지만 그것도 1학년 때 정도였고, 시간이 지나 싸움을 말릴 사와무라 선배들도 졸업하고 난 이후로는 우리에게 점차 그런 말을 내뱉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여전히 제왕이라고 불러대긴 했지만 어느샌가 그 별명도 그리 귀에 가시처럼 박혀오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후배들이 들어오고 난 이후로 나긋한 예의 그 말투로 애들의 멘탈을 자근자근 밟아주는 녀석을 보며 나한테 했던 말은 약과였군,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울상을 지으며 나가떨어지던 후배들도 서서히 익숙해져서는 녀석이 입을 비죽이며 얄미운 소리를 안 하면 ‘츠키시마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라며 되려 걱정하곤 했다. 그러니까 지금 수준의 얄미움은 적당히 PASS 가능.

떠오르는 질문에 하나씩 답을 갖다 붙이고, 또 다음 질문에 답을 하고. 그래도 여전히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질문의 꼬리에 답을 붙이고 답의 꼬리에 이어지는 질문에 한참을 난감해하며 가로등 불빛이 새어들어와 고인 방 모서리를 바라보다 알아차렸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나는 딱히 츠키시마 케이와 하우스 쉐어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근 3년간 함께 해오면서 알게 된 바, 녀석은 깔끔한 편이고,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개념이 강한 만큼 타인의 영역도 적당히 지켜줄 줄 알고, 입 비죽이며 날선 소리를 해대긴 하지만 같은 편일 때는 든든한 면도 있고, 머리회전도 빠르다. 츠키시마 케이는 하우스메이트로 나쁜 상대가 아니다. 합숙이나 시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편하기도 하고. 아무리 학원도시라지만 엄연히 도쿄도다. 월세를 반반 낼 수 있다고 하면 부모님께도 부담이 덜 할 테고. 심지어 엄마 말처럼 막막한 대학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물론 그 녀석은 또 엄청 잘난 척을 해대겠지만.

내가 애초에 처음 질문을 잘못 던진 건, ‘진짜 같이 살 거야?’라는 영 탐탁지 않아 하는 녀석의 말 때문이었다.

 

*

 

“츠키시마.”

1학년의 블록을 봐주고 돌아서는 녀석을 불렀다. 츠키시마는 무슨 일이냐는 식으로 대답도 없이 눈썹만 설핏 올렸다.

“잠깐 얘기 좀.”

손가락으로 체육관 밖을 가리키니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체육관 구석에 개어 놓았던 저지를 어깨 위에 걸쳤다.

“뭐야뭐야, 이제 곧 졸업이라고 아침 연습 땡땡이냐아으악!”

“시끄러 히나타!”

뒤에 따라붙어 시끄럽게 외치는 히나타의 머리를 꽉 쥐어 흔들어주고 나도 저지를 집어 들어 팔을 꿰어 넣으며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빡빡한 체육관 문을 밀어 닫고는 계단에 삐뚜름하게 기대어 섰다. 양 손을 주머니에 넣은 녀석이 계단참 아래 서서는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가와라 씨 얼굴을 떠올린다. 직진, 직진으로 말한다.

“넌 나랑 같이 사는 거 싫어?”

“뭐?”

또 눈썹 끝이 하늘로 치솟는다. 예전에는 저 인상에 불퉁한 말이 더해지면 싸우자는 신호와도 같았는데.

“어제 진짜 같이 살 거냐고 물어봤잖아. 너는 나랑 같이 사는 거 싫어?”

녀석은 한숨을 내쉬더니 검지 손가락을 굽혀 이마 사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싫다 좋다 하기 이전에. 너 방학 동안엔 거의 합숙할 거 아냐?”

“뭐, 아마 그렇겠지?”

“학기 중에도 여기저기 훈련 갈 수도 있는 거고.”

“글쎄.” 아니, 같이 사는 게 어떻냐고 물어봤는데 왜 난데없이 합숙이며 훈련 얘기를 하는 거야. 이해되지 않는 질문들에 잠시 입술을 구석으로 밀어 넣자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네가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을 텐데 월세 반반 내면서 지내면 너한테 손해인 거 아냐?”

“응?”

“응은 무슨 응이야, 생각이란 걸 좀 하라고, 제왕님.” 츠키시마는 공간이 어쩌고, 렌트가 어쩌고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 특유의 사람 내리깔보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지금은 계단 아래 서 있는 녀석보다 내 눈높이가 훨씬 더 위다.

“이봐, 제왕, 듣고 계셔?”

“뭐야, 그러면 나랑 같이 사는 게 싫다는 건 아냐?”

녀석은 툴툴거리던 입을 다물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고개를 홱 돌렸다. 또 혼자 입 안에서 뭐라 꿍얼대며 미간 사이를 좁힌다. 차디찬 아침 공기에 볼이며 귀며 조금씩 발갛게 얼어붙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아- 하고 내쉬는 숨에 하얗게 수증기가 맺혔다.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며 어렴풋이 알아차린 게 있다면 이 녀석은,

“딱히 싫을 이유도 없잖아.”

돌직구에 약하다.

어제부터 하루 동안 이어져 오던 찜찜한 기분이 쾌청한 아침 공기에 실려 싸악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씨익 웃음이 걸렸다.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었던 건 아니란 말이지?

어차피 각자 방 있고, 너랑 나랑 생활사이클이 그렇게 겹칠 거 같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말하던 츠키시마는 아무런 답이 없는 나를 쳐다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 웃음, 기분 나빠.”

얘기 이걸로 끝? 추워, 들어간다, 하며 녀석은 주머니에서 꼼지락 대던 손을 꺼내 나를 지나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등 뒤에서 밀려나오는 체육관 안의 후끈한 기운과 함께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들과 팀메이트들, 늘어난 후배들과 함께하면서 서툴기 짝이 없던 인간관계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츠키시마의 뭔가 불편한 듯한 뉘앙스의 말 하나에 한없이 찜찜한 기운이 밀물처럼 달려와 하루종일 고여있었다. 바닥으로 가라앉던 기분이 함께 사는 게 싫었던 건 아니란 걸 알아차리자마자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신기했다.

“카게야마 군, 추운데 안 들어와?”

야치가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아아, 갈게.”

자, 아침 연습 마저 하러 가야지.

“어이, 히나타 멍청아! 그 쪽으로 뛰면 부딪치잖아!”








2.


 

 

신칸센 발차 전 플랫폼에서 츠키시마의 어머니는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물어왔다. “카게야마 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경기할 때 종종 찾아오던 츠키시마의 형을 먼발치에서 봤을 때도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츠키시마가 가족 중에서 가장 많이 닮은 건 형보다는 어머니가 아닐까. 이목구비가 주는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물론 말끔한 얼굴로 웃으면서도 사람 속 뒤집어놓는 말을 뱉어내는 츠키시마와 다르게 그의 어머니가 짓는 웃음은 해사하면서 따뜻했다.

“네, 넵! 물론입니다!”

괜히 긴장되어 정자세로 서서 소리 높여 대답하자 어머니는 후후 웃으시더니 허리를 꾸벅 숙이셨다.

“우리 케이 밥 잘 먹는지 조금만 챙겨줘요. 번거롭겠지만 부탁할게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꼭 책임지고 삼시 세끼 잘 챙겨먹게 하겠습니다!”

인사를 받는 것이 더없이 민망하여 나도 허리를 숙이며 더욱 목청 돋워 대답했다. 츠키시마의 어머니는 한 것도 없는 내게 고맙다며 손을 꼭 잡으며 카게야마 군도 몸 잘 챙기고 건강하라는 덕담을 덧붙이셨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형님과 두런두런 대화하다 일방적인 포옹을 받다,를 반복하던 츠키시마는 제 어머니 곁에 다가오더니 뭔 그런 부탁을 하냐며 더 이상 애가 아니라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불퉁한 얼굴이긴 마찬가지지만 배구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짓던 이죽거리는 표정과는 달랐다.

“아무리 큰다고 해도, 나이를 먹어도 케이는 우리집 막내란다.”

츠키시마의 어머니는 팔을 쭉 뻗어 한참 큰 키의 츠키시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표정은 한껏 토라져 있지만 싫지는 않은 듯 츠키시마는 슬쩍 어머니의 손에 맞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어느새 다가온 츠키시마의 형님도 그의 뒤에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열차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해 금세 이른 아침의 플랫폼을 벗어났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츠키시마는 가방을 끌어당겨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절로 입가에 맺히는 웃음을 꾹 내리누르며 운을 띄웠다.

“형님…,”

“응?”

옆에 앉은 츠키시마는 가방을 뒤적여 안대를 꺼내며 여상스레 답했다.

“‘형아’라고 불러?”

나는 보았다. 순간 가방 지퍼를 당기던 녀석의 손이 딱 멈추는 것을. 태연하게 슬쩍 곁눈질로 얼굴을 훔쳐보았다. 안 그래도 하얀 녀석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더 하얗게 보이는데 살짝 뾰족한 귀 끝에서부터 귓바퀴를 따라 붉어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조금 멀리 던지니 창가에 비친 녀석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 부들부들, 상태다.

먼저 열차에 오르고 뒤이어 열차에 오르던 츠키시마가 한 말을 분명하게 들었다. ‘엄마도 아빠도 잘 지내고... ‘형아’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꾹 누르고 츠키시마를 쳐다보지 않은 척, 딱히 필요도 없는 간이 테이블을 내려놓았다 다시 올려놨다, 꺼낼 것도 없는 가방 안을 괜히 들여다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사이 좋나 보네.”

옆에 앉은 녀석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굳어있는 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웃겼다. 더 놀려주고 싶다. 츠키시마를 놀릴 수 있는 날이란 일 년에 몇 번 없는 초레어한 날이다. 심지어 작년에 타나카 씨들마저 졸업한 이후로는 이 건방진 츠키시마 녀석! 하며 짓궂게 달려드는 광경을 보기 힘들어졌다.

“뭐… 별로.”

그래? 흐음, 하며 딴청을 피우자 츠키시마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곁눈으로도 노려볼 수 있다니 엄청난 재능이다. 여전히 귀 끝은 빨갛게 된 채였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왜 선배들이 이 뻣뻣한 녀석에게 달려들곤 했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더 놀려주고 싶다만 사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고 계속 하다가는 신칸센에서 쫓겨날 정도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배구바보 소리를 듣는 나지만 이 정도는 안다 이제. 게다가 맞벌이로 늘 바쁜 부모님과 아침에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나온 나와 달리 집에서 막내라고 이쁨받는 츠키시마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도 사실이고.

별말 없이 노려보던 츠키시마는 들릴 듯 말 듯 쳇, 혀를 차더니 안대를 쓰고 헤드폰까지 둘렀다. 가슴 앞에 단단히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돌렸다.

잘 거니까 건들지 말라 이거지? 흥, 나도 잘 거다.

 

 

드륵-득-, 드르득- 무언가를 긁는 기계적인 기묘한 소리에 잠들었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깼다. 어디든 머리만 대면 순식간에 잠드는 터라 얼마만큼 잤는지도 모르겠다. 귓가를 괴롭히던 소리는 츠키시마의 좌석 앞 간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리는 소리였다. 잠이 얕은 녀석이 또 저 소리에 깨어날까 싶어 핸드폰을 살짝 들어 올리려는 찰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쳐내듯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뭐야, 깼어?”

츠키시마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안대를 끌어 내렸다. 여전히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간헐적인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안 뺏어간다, 안 뺏어가.

목 앞뒤로 헤드폰과 안대를 주렁주렁 걸어놓은 츠키시마는 눈가를 찡그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안경을 주섬주섬 쓰더니 그제야 눈을 제대로 뜨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츠키시마의 손이 핸드폰을 낚아채기 직전, 라인 메시지가 홈 화면 가득히 와 있는 걸 슬쩍 보았다. 누구길래 저러지, 야마구치인가. 언제나 로우 텐션인 녀석이 답지 않게 군다.

나도 그렇지만 츠키시마도 배구부 단체 라인에서 답이 늦기로 유명하다. 나야 핸드폰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아 한참 대화가 진행된 후에 본다지만 츠키시마는 읽고도 답을 안 한다고 팀원들의 원성을 사기 일쑤였다. 뒤늦게 핸드폰에 몇십 개씩, 심지어 백 개 넘게 쌓인 알림에 들어가 보면 ‘어이, 츠키시마, 읽은 거 다 알아!!!’ ‘츠키시마 씨, 읽었으면 뭐라고 반응을 해주세요오’ ‘츳키 선배!’라며 우는 얼굴들이 한가득이었다.

지금 눈을 빛내며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 다들 뭐라고 할까 싶을 정도다. 토도로독, 토독, 아주 쉴 새가 없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길래 저럴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란 생각에 모로 고개를 돌려 다시 잠을 청했다. 아직 도착하려면 조금 더 가야 한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닌데 츠키시마의 손가락이 화면에 닿는 소리가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처럼 토독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인데도. 슬쩍 바라본 녀석의 옆얼굴에 아주 미묘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토도독, 토독. 웅-

토독. 우웅-

시끄러웠다.

 

*

 

신칸센 도착. 열차를 갈아타고 도쿄 중심부에서부터 40분가량. 역에서 내려 또 버스로 세 정거장. 2층짜리 아담한 가정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 거리를 한 블록 걸어간다. 잘 정비된 2차선 도로임에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코너의, 근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7층짜리 일반 맨션의 5층. 이곳이 도쿄에서의 새로운 집이다.

 

‘C대 학생들은 보통 후문 근처에서 많이 다닙니다.’

이달 초, 츠키시마와 나는 어머님들과 함께 자취할 집을 구하러 왔다. 부동산 중개사는 그렇게 말하며 후문 쪽을 돌아다니며 방을 보여주었다. 주택, 아파트, 일반 맨션 등 주거 건물들이 몰려있는 동네였다.

‘이 옆에 M대랑 T 의약대 캠퍼스도 있어서 대학생들이 많이 살고, 월세도 싼 편이니 도쿄시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도 꽤 있어요.’

월세가 싼 편이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도쿄 중심부에 비교해 그렇다는 거지, C대 후문 근처는 인접한 M대와 바로 앞에 있는 전철역 때문인지 그리 싸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츠키시마는 옆에 어머님들이 계셔서인지 별말은 안 했지만 짧은 눈썹이 이마 사이에 꼭 박혀 치켜 올라간 끝이 내려올 줄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3층짜리 복도형으로 길게 늘어선 목조 아파트를 보고 나오면서 엄마는 여기는 구조나 크기는 좋긴 한데, 자재가 너무 얇은 느낌이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어머님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난처한 미소만 짓고 있던 중개사는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정문 쪽은 조금 멀긴 한데 그쪽에 괜찮은 집이 있으니 보시겠냐며 물어왔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오늘은 계약해야 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며 소곤거리던 어머님들의 마음에 쏙 든 곳이 바로 이 집이었다.

2LDK 일반 맨션. 신혼부부가 산 집인데 급작스레 해외지사 발령을 받아 세를 주고 나가게 되었다며, 지난 1년간 C대 졸업반 학생 둘이 지냈던 집인데 둘 다 일찌감치 취직이 결정되어서 나가게 되었다고, 학교에서는 좀 멀고 전철역도 먼 편인 걸 감안해서 후문 쪽의 같은 급 맨션들보다는 훨씬 싸다는 얘기를 듣는 엄마의 눈은 별말 안 해도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토비오, 넌 어떤 거 같니.’

사실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 별 관심도 없고 - 이 집은 좀 낡았구나, 이 집은 좀 새 집이구나, 싶은 정도였다 - 한 시간 전부터 이미 지쳐버린 나는 그냥 멀뚱히 고개만 끄덕였다.

츠키시마는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문간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케이, 어떠니? 학교에서 좀 먼 거 같긴 한데.’ 츠키시마는 두어 블록 너머의 하천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대답했다. ‘여기가 조용해서 더 좋아요.’

 

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휑한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신발을 현관에 벗고 올라서서 미닫이로 분리된 부엌으로 들어선 뒤 오른쪽으로 돌면 작은 공간의 거실, 그리고 남쪽을 향해 나 있는 베란다. 츠키시마는 바닥에 가방을 툭 내려놓더니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었다.

“짐 풀기 전에 대충 청소는 해야겠는데.”

“그러게.”

짐이라고 해봤자 택배로 부친 옷가지나 침구류 정도다. 가구도 대충 구하러 나가봐야 하고, 냉장고도 채워 넣어야지. 할 일이 많은 하루다.

츠키시마는 베란다 문을 열고는 문틀에 기대서서 처음 집을 보러온 날처럼 꼼짝하지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뭐 볼 게 있다고 저렇게 서 있나 싶어 옆에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근처의 건물들은 대부분 2층이나 3층짜리 주택들뿐이라 주변 풍경이 막힘없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해는 이미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 오른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내려다보는 시선을 따라가 보니 주택단지를 끼고 도는 긴 하천을 향해있었다. 하천이라고 해봤자 강폭이 그리 넓지도 않고, 겨울 동안 강둑의 풀들도 말라붙어 있는 모양새였다.

“뭐 보냐.”

“…아무 것도. 내가 안 쪽방 써도 되지?” 묻는 말을 던져놓고 답도 듣기 전에 녀석은 휑하니 몸을 돌렸다. 어차피 이미 정해놓은 거 같은 물음에 딱히 상관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 후에도 타고난 다정함으로 먼저 안부를 물어와 주는 스가와라 씨에게 츠키시마와 자취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순간 놀란 목소리였던 스가와라 씨는 금세 웃더니만 ‘같이 살게 되면 몰랐던 면도 알 수 있고, 생각보다 더 안 맞거나 아니면 의외로 잘 맞을 수도 있을 거’라며 ‘츠키시마가 말하는 방식에 휘말려서 화내지 말고 정면으로 잘 얘기해서 풀고, 이왕이면 재밌게 지내’라고 했다.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다만, 몰랐던 면은 확실히 하나 알았다. 아니, 몰랐던 게 아니다. 좀 더 알게 되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쩨쩨하다 이 녀석.

별 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척척 물건을 담는 나에게 이거보단 이게 싸다느니, 이 사이즈는 방문을 통과 못 한다느니 잔소리가 비죽비죽 이어졌다. 말끝마다 어쩌고 제왕, 저쩌고 배구바보, 운운. 나름 이 녀석의 이죽거리는 소리에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라고 비웃는 듯 머리가 부글부글 끓었다. 입을 열었다간 대판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스가와라 씨가 해준 조언도 있고 첫날부터 싸워서 이 녀석과 앞으로 어떻게 지내겠냐는 생각으로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서 걷던 츠키시마는 쳇, 재미없어졌어, 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재미없다고?

“예전에는 길길이 날뛰면서 달려들더니만, 히나타는 여전한데, 넌 언젠가부터 재미없어졌어.”

“하아?!”

어이가 없어 순간 발이 굳어버렸다. 덕분에 척척 걸어가던 츠키시마는 몇 걸음 지나치고서야 멈춰 서서 뒤돌아봤다. 3초간 말없이 날 쳐다보던 츠키시마는 혼자 하하,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겨?”

“표정 바보 같네 정말. 아까 말 취소, 제왕님 여전히 재밌네.”

“뭐?!”

하나 더. 이 녀석은 내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다.

하도 어이가 없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가 김샌 것처럼 푸욱 빠져버렸다. 츠키시마 녀석의 낮은 웃음소리가 조그맣고 길게 이어졌다. 저 녀석은 누굴 놀려먹을 때 꼭 저렇게 생기가 넘쳐난다.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하, 헛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한 번 번진 웃음은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결국, 처음에 무엇 때문에 웃게 되었는지 기억도 못 하고 둘이서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배달할 것들을 주문하고, 당장 필요한 장을 한가득 봐서 낑낑대며 들고 들어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래 이동해서 밥맛이 별로 없다는 츠키시마를 어머니와의 약속 운운해가며 반협박으로 앉혀놓고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게 했다. 얼추 집 정리를 하고 나니 하루가 다 지나간 것 같았다. 이리도 긴 하루가 또 있나 싶을 정도로 오늘 아침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집을 떠나온 지 24시간도 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충 옷장 정리를 해놓고 화장실에 가려고 잠시 나왔는데 어서 짐 정리하라고 날 방에 밀어 넣은 츠키시마 본인은 정작 베란다에 나가 기대서 있었다.

“뭐야, 방 정리하라더니.”

“나야 다 했으니까.”

“빠르기도 하다. 대충 욱여넣은 거 아냐?”

“본인 얘기 하지 마시죠?”라며 환하게 웃은 츠키시마는 - 경험상 저 웃음은 상대방을 놀릴 때의 1등급 웃음이다 - 뭐, 네 방이지 내 방 아니니까, 라며 오른손으로 뭔가 집어 내 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거실 빛에 그림자가 져 제대로 안 보이던 녀석의 왼손에 들린 건 맥주캔이었다. 이사 기념, 하며 녀석은 자신의 손에 들린 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치익-소리를 내는 둔탁한 맥주캔을 부딪치고는 둘이 아무 말 없이 한 모금씩 꿀떡꿀떡 마셨다. 츠키시마는 제 키에 비해 조금 낮은 베란다 턱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았다. 녀석을 따라 시선을 조금 멀리 던지자 양쪽으로 가로등이 간간이 서 있는 강이 어둠을 삼킨 듯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 잔뜩 껴있던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달이 나왔다. 검은 수면에 달빛이 잘게 부서졌다. 도쿄의 겨울과 봄의 경계에 부는 밤바람은 미야기와는 다른 묘한 내음이 났다. 시멘트와 연기의 매캐함이 섞인 것 같으면서도 끝에 고소함이 풍기는 바람이었다. 공기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강 위에서 부서지는 빛은 제각기 다른 형태를 그려냈다. 한참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한숨처럼 말이 나왔다. 이쁘네.

“헤에, 제왕, 그런 심미안도 있었어?”

어느새 허리를 쭉 빼고는 몸을 접어 그리 높지도 않은 베란다 턱에 팔을 포개 얼굴을 기대있는 츠키시마는 고개만 돌려 나를 올려보면서 비죽 웃었다.

“나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쯤은 있거든?!”

“아하, 제가 황송하옵게도 몰라뵈었습니다요?”

겨우 맥주 한 캔에 취했는지 녀석은 평소보다 실실 웃으면서 말꼬리를 길게 빼고 올리며 놀려댔다. 자기가 한 말에 혼자 키득거리던 녀석은 하아- 깊은 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게, 예쁘긴 하네. 노을 질 때도 좋더니만.”

그러고 보니 이 집 처음 보러 온 날, 꽤 늦은 오후였더랬지.

그 날도 츠키시마는 이렇게 수면에 흩어지는 빛을 보고 있었던 걸까.

다시 구름 무리가 달을 가리기까지 꽤 오랫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달이 숨어버려 캄캄한 어둠 속으로 물이 덩어리져 녹아들자 츠키시마는 빈 맥주캔을 구기더니 잔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오늘 알게 된 것 하나 더.

츠키시마는 흔한 것들을 생각보다 오래 바라본다.








3.

 

 

 

츠키시마와 같이 지내게 된 지 보름 남짓. 그동안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지난 3년간 아침 연습, 오후 연습, 주말 훈련, 방학 합숙 등으로 같이 먹고 운동하고 자고 싸우고 동고동락하면서 나도 이제 녀석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같은 집에서 생활을 공유하는 건 완전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다. 심지어 나나 츠키시마 둘 다 말이 많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타입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하나, 특정인(들)과는 열심히 라인을 한다.

핸드폰이 울려도 흘깃 보고 집어넣기가 일쑤인 녀석이 한 번은 진동이 울리자 확인을 하더니 곧장 답장하기 시작했다. 근거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 신칸센에서 연락하던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저 녀석이 저렇게 핸드폰을 붙잡고 즉답을 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냐는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자동으로 재생이 되어 모른 척했다.

[도쿄는 어때, 배구팀 사람들은 만났어?]

잔뜩 시끄러운 목소리가 담긴 듯한 메시지를 보내는 히나타와 이야기를 하다 츠키시마의 이상행동에 관해 이야기했다. 잠시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던 히나타는 발상의 전환을 이뤄냈다.

[우리들이 얘기할 때만 무시하고

의외로 다른 사람들하고는 곧잘 얘기하는 건?

Σ((((o△o)))]

그…런 걸까.

 

둘, 아침에 약하다.

어떻게 이렇게 아침에 약한 녀석이 3년간 연습할 때는 멀건 얼굴이나마 꼬박꼬박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첫날 본 강변의 작은 길은 다음 날부터 조깅 코스가 되었다. 가볍게 뛰고 돌아와 씻고 아침 먹을 준비까지 다 했는데 츠키시마의 방문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똑똑- 방문을 두들겨봤지만 안에는 사람이 없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두들기며 츠키시마를 불렀다.

“츠키시마, 나와서 아침 먹어.”

두세 번 노크하며 끈질기게 부르자 그제야 안에서 ‘으으으-’ 하는 의미불명의 소리가 끊어질 듯 미약하게 들려왔다. 이건 사람의 목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어이, 괜찮냐? 들어간다?”

미닫이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가니 츠키시마의 침대 위에는- 한 마리의 도롱이? 이불을 돌돌 말아 마치 크로아상처럼 가운데는 볼록하고 한쪽 끝에는 츠키시마의 머리카락이 삐쭉 솟아있었다. 그 괴상한 형체를 보고 문간에서 순간 굳어버렸다. 다시 ‘으음’하는 소리와 함께 그 크로시마는 꿈틀거렸다.

“어이, 일어나서 아침 먹어.”

“으ㅇ…”

“뭐라고? 안 들려.”

“아으…”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 같긴 한데 이불 속에 얼굴이 폭 파묻혀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가가서 머리카락 쪽의 이불을 끙끙거리며 말아내리니 잔뜩 찌푸린 얼굴이 나타났다.

“아침 먹으래도.”

“아아안 먹는다고오오……”

“뭔 헛소리야 아침 먹어.”

눈도 못 뜨고서 제왕의 독재가 벌써부터 시작 어쩌고를 말도 안 되는 발음으로 웅얼거리는 - 뭔 말인지 처음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끼워 맞춰서 저 말을 알아낸 나 자신이 놀라울 지경이다 - 녀석을 반대 방향으로 굴려 이불을 벗겨내고는 질질 끌어다 아일랜드 식탁 앞의 의자에 앉혔다.

녀석은 정신을 못 차리고는 식탁 위에 다시 팔을 포개 엎드리려고 했다.

“야- 정신 차려.”

엎드리려는 녀석의 어깨를 잡아 세우고는 손에 숟가락을 억지로 쥐어줬다. 여전히 실눈도 못 뜨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이가 터져나갔다. 솔직히 나 몰라라 하고 싶었지만 츠키시마의 어머니께 삼시세끼 책임지고 챙겨 먹게 하겠다던 약속과 해사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나 어금니를 즈려깨물며 요거트 뚜껑을 손수 따서 왼손에 들려줬다.

 

*

 

“첫 아침은 그거 다 먹을 때쯤 되니까 겨우 눈을 뜨더라고요.”

츠키시마를 깨우고 아침 먹이느라 고군분투한 이야기에 스가와라 씨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옆에 앉은 엔노시타 씨도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관동 지역으로 진학한 스가와라 씨와 엔노시타 씨가 개강하기 전에 얼굴을 보자며 약속을 잡아 세 명이 다 비슷한 거리에 있는 신주쿠에서 만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츠키시마도 같이 데리고 오라고 했지만, 말을 전하자 츠키시마는 그런 건 당일이 아니라 미리 말해야지, 선약이 있다며 다음에 보겠다며 먼저 집을 나섰다.

한참을 배를 부여잡고 웃던 스가와라 씨는 눈물이 찔끔 맺힌 눈가를 훑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그런데 츠키시마는 합숙할 때도 그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아침에 정신을 잘 못 차리긴 했어.”

“그랬나요?”

“넌 아침에 거의 제일 먼저 일어났잖아. 게다가 합숙할 때야 니시노야나 히나타가 워낙 시끄럽게 해서 다들 곧잘 일어난 편이지. 나도 집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일어났는걸.”

엔노시타 씨도 음 그랬지, 라며 말을 보탰다.

턱을 당기며 고등학생 때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보니 잠에서 막 깨어난 츠키시마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아침의 츠키시마는 늘 식당에서 깨짝깨짝 젓가락질하는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엔노시타 씨는 기억을 더듬는 날 보며 웃더니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야 히나타랑 아웅다웅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고.”

“맞아, 카게야마는 여러 곳에 신경을 쏟진 못 하지.” 멀티 태스커는 못 된다고 할까나, 손가락을 척 세우며 말한 스가와라 씨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씨익 웃었다. “어때 내 말이 맞았지? 함께 살다 보면 못 보던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거라고. 지낼 만해?”

“잘 모르겠어요. 아직 한 달도 안 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엔노시타 씨가 말했다.

“나는 너네 둘이 가깝게 지내면 꽤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엑- 어째서죠?”

“음-” 엔노시타 씨는 잠시 말을 골랐다. “내가 보기에 카게야마 너는 관심 있는 것 이외에는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츠키시마는 관심 유무와 상관없이 전체적인 것들을 빠르게 캐치해내는 편이지. 그런데 표현하는 방식은 너는 돌려 말하는 법 없이 앞으로 달려나가고, 츠키시마는 이리저리 배배 꼬아.”

엔노시타 씨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뱀 모양의 파형을 구불구불 그렸다. 올라갔다 내려가는 손가락을 따라 스가와라 씨도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다른 점이 많은 거에 비해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둘이 비슷할 때가 종종 있어서.” 소위 말하는 ‘메카-니즘’은 다른데, 그에 따른 결과가 비슷한 면이 있으니 같이 지내다 보면 장단점을 서로 채워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라고 엔노시타 씨는 부연설명을 해 주었지만 나는 그 앞의 말도, 뒤의 말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스가와라 씨는 펜을 꺼내 티슈에 쓰며 예를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자, 너는 ‘2+2+2+2’라고 하면, 츠키시마는 ‘2*2*(2^2)/2’인 거야. 결과로는 둘 다 8이 나오지?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경로는 달라.”

수식은 이해했지만 여전히 그게 엔노시타 씨의 말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끝까지 티슈를 붙잡고 있는 날 보고 다시 시원하게 웃었다.

 

*

 

평소에는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는데 이상하게 새벽녘에 목이 말라 깼다. 낮에 선배들과 만나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익숙하지 않은 시각에 깨어나 몽롱했다. 몸에서 혼이 1cm 가량 떠 있는 낯선 느낌이었다. 눈도 다 못 뜬 채로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부엌으로 향했다. 서늘한 밤공기가 발목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종아리를 타고 찬 기운이 올라와 흠칫, 눈을 비벼 떴다. 베란다 문이 한 뼘만큼 열려있었다. 츠키시마가 또 베란다의 예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디에서 주워왔는지 모를 철제형 스툴을 베란다 오른쪽 구석에 가져다 놓고 길고 마른 몸을 말아 위태롭게 그 위에 앉아있었다.

도쿄라고 해도 아직 3월, 새벽공기는 차다. 들어오라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다르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점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좀 더 뚜렷하게 보이는 형체는 짙은 색의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가느다란 세 다리의 스툴 위에 불안하게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채로 꼼짝하질 않았다. 습기 서린 공기는 그 자체의 밀도를 갖고 바닥에 가라앉은 채로 온 집안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높이에서 츠키시마의 형체를 그려내는 건 오로지 미약한 달빛뿐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온몸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굽은 등 위로 옅고 불안한 빛이 흘러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철제 스툴에서 나는 끼긱- 마찰음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츠키시마가 안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았다. 녀석이 일어서려 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급히 방으로 돌아왔다. 목이 마르단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셋, 녀석은 밤중에 홀로 깨어있을 때가 있다.

원인, 불명.








4.


 

 

후문 쪽에 학생들이 많이 사는 이유가 있었다. 캠퍼스 동쪽에 있는 후문에서 직통으로 이어진 모노레일 역,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주거단지는 모두 평지다. 반면 우리 집에서 정문까지는 걸어서 20분가량, 커다란 사거리에서부터는 오르막길로만 15분이었다. 그리고 정문에서부터 수업을 듣게 될 주요 건물까지의 거리가 약 5분 내외. 학생들은 주로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모노레일 역에서부터 오는 건지 정문으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다니면서 느꼈지만 정문까지 올라가는 이 길은 미야기와 별로 풍경이 다르지 않다. 1차선 도로를 다니는 차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가파른 비탈길 양옆은 딱히 이렇다 할 건물도 없이 나무들이 서 있었다. 슬슬 꽃송이가 맺혀가는 듬성듬성한 나무들 사이로 얼핏 봐도 오래된 듯한 목조 주택들이 간간이 보였다. 건물보단 뭐가 자라는지 모를 밭들이 더 많은 풍경이었다. 학교에 들어서면 캠퍼스 안에서 대부분이 해결되지만 밖은 삭막한 풍경인 게 미야기보다 더한 시골의 느낌일지도.

왼쪽 코너로 도는 오르막길에서 지역 버스가 다니는 낡은 정류장 표지를 보더니 츠키시마는 한숨처럼 말했다.

“일장일단.”

“뭐?”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라고. 이 등굣길은 좀….” 오르막길로 접어들기 전 사거리의 커다란 패밀리마트에서 산 우유팩을 입에 문 채 츠키시마는 중얼거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그다지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비탈길을 점차 올라갈수록 숨차하는 모습이었다.

배구부 선배들은 내가 자취하는 곳의 위치를 듣더니 ‘아하하, 그쪽 비탈길로 학교에 다니고 졸업한 사람들의 다리는 J-리거 못지않다는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지.’ 어깨를 두들겼다. 힘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운동하는 셈 치면 되잖아.”

저는 누구처럼 배구바보가 아니라서요, 어깨를 추켜올리며 비웃는 녀석을 보다가 그동안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꺼냈다.

“너 대학에선 배구 안 할 거야?”

“…….”

잠시 조용하던 녀석은 어깨의 가방을 고쳐 올리며 앞으로 먼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안 해. 세미나에도 들어가고, 장학금도 놓치면 안 되고. 바쁠 거야.”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얇은 눈썹이 이마 사이를 향해 좁혀 들어갔다. 그리고 입술 사이의 빨대를 잘근잘근 짓이겼다. 흐음- 얼마나 바쁠 거길래 저런 비장한 얼굴이래.

 

*

 

“안녕하십니까!”

“오오, 카게야마, 안녕.”

개강 첫 주라 오리엔테이션 위주인 수업이 일찍 마치자마자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입학 전, 감독님의 배려로 미리 배구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겨울 방학 막바지 훈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상학부의 O 선배에게 들으니 다들 학부가 다르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전공 수업들을 무턱대고 빼먹을 수 없기 때문에 학기 중 아침과 오후는 자율 훈련, 그리고 저녁 식사 전후로 팀 연습을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방학 동안 훈련 강도가 높아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우리 감독님은 좀… 자기 관리 우선! 이런 신조지만.’

‘응응, 오버 워크 금물! 부상이라도 당해서 선수생활 짧아지면 안 된다! 늘 그러셔.’

그렇다고 해도 대학의 훈련 수준은 훨씬 높았다. 국가대표 출신인 감독님과 전문 코치진이 포진하고 있는 강호였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스피드 중심의 플레이를 선호하는 감독님 눈에 띄어 추천 입학이 가능했기에 기대도 강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이, 카게야마.”

정신없이 흘러간 훈련을 마치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은 법학부의 I 선배였다. 3학년이지만 실질적으로 이 배구부의 에이스인 데다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다.

“넵.”

“너, 우리 과 1학년의 그, 츠키시마라고, 그 녀석 혹시 알아? 걔도 미야기 출신이라던데.”

“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요.”

오오, 럭키! 하며 I 선배는 달려들었다. 시끌시끌한 성격인 I 선배의 호들갑에 근처에 있던 O 선배도 뭔데뭔데,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이 두 사람,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니시노야 씨와 타나카 씨 같은 페어다.

“아, 우리 과에 츠키시마라고, 장신인 녀석이 들어왔단 말이야. 배구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는데, 하도 쌩-하길래.”

“그 녀석, 고등학교 때 배구했어요.”

“뭐?! 너랑 같은 학교 배구부였으면 봄고도 갔다는 거잖아, 포지션 어디? 잘 해?”

“미들 블로커인데 플레이가 영리해요.”

“오오- 좋잖아~! 데리고 와라!” 그리고 올해도 우승하자고 대학 리그! 요옵! 하며 서로 투지를 불태웠다. 팔을 크로스하며 신이 난 선배들에게 아침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안 하겠다던데요.”

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어오는 선배들에게 장학금이니, 세미나니, 이야기하자 두 사람 다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그렇군... 머리 좋은 녀석이군.”

“우리랑 다른 세계, 장학금이라니.”

정작 저렇게 말하는 두 사람 다 우리 학교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된 단 두 명으로, 코치님에게 듣기로는 등록금 감면부터 시작해서 학교로부터 톡톡히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나저나 꽤 친한가 봐.” 회복이 빠르다. I 선배는 금세 생글 웃으며 다시 말을 붙여왔다. 친한가. 친하다는 기준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같이 살면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난감함이 스쳐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아, 네, 뭐…. 하우스 쉐어해요.”

“에엑- 그런 냉미남이랑?!”

냉미남이라니, 뭐야, 잘생겼어? 라고 묻는 O 선배에게 I 선배는 아니, 입학하자마자 동기 여학생들이 괜찮은 애가 들어왔다느니 하도 그래서- 이미 그런 이미지로 굳어졌나 보던데…,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냉미남? 츠키시마 녀석이 어딜 봐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려봤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제왕님 혹은 배구바보, 하면서 비죽 웃는 얼굴이었다. 으으음- 다른 얼굴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그 이후로도 생각나는 것들은 안경 너머로 차갑게 웃는 모습이라든가, 입을 비죽이며 잔뜩 싫은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이라든가, 사람을 쏘아버릴 듯이 노려보는 시선 같은 것들뿐이었다. 아…,

크로시마.

아침마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크로아상 모양의 츠키시마. 크로시마는 좀 짜증나고 귀찮긴 했지만, 귀여울지도?

…잠깐. …아니야.

귀엽지 않다. 귀찮은 거다 그건.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 떠오른 이상한 감상을 털어내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에서 날 지켜보던 선배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킬킬 웃으며 각각 양쪽 어깨를 두들겨줬다.

“카게야마 힘내라. 너도 괜찮은 얼굴이긴 해.”

“음, 그래, 입만 안 열면.”

“그럼그럼.”

아, 네, 감사합... 네? 입만 안 열면, 이라니. 뭡니까? 내 물음에 선배들은 체육관이 떠나가라 웃다가 결국 코치님에게 할 일 없으면 얼른 가라, 며 한소리 듣고 말았다.

 

*

 

4월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하고 저녁 연습이 이어졌다. 연습 자체는 평소와 비슷하게 끝났지만 코치님에게 이런저런 어드바이스를 듣다 늦어버렸다. 팀원들은 모두 먼저 가고 마지막으로 체육관과 부실을 정리하고 나섰다. 체육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체육관 아래쪽에 있는 넓은 야외 수영장을 비추는 불빛도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오늘은 유독 늦었네. 수면 위를 밝게 비추던 수영장의 야간 조명이 꺼지자 길 가 한 켠에 죽 늘어선 주홍빛 가로등 불빛만이 남았다. 수영장을 끼고 돌면서 보니 수면 위에서 가로등 불빛이 미약하게 부는 바람에 가만히 흩어지고 있었다. 츠키시마와 맥주를 마시며 보던 강물과 그 위에서 쪼개지고 합쳐지던 빛살이 떠올랐다. 그 녀석, 저녁은 챙겨 먹었으려나.

각종 운동 경기장과 체육관은 캠퍼스 남동쪽의 외딴 곳에 몰려 있어 정문으로 나가려면 건물들이 몰려 있는 본관까지 빙 돌아가야 했다. 체육관에서 정문까지 직선거리로는 가까웠지만, 제대로 정비된 길이 없었다. 선배들은 ‘뒷산에서 뱀이 나온단 얘기가 있어...’ 라며 투덜거리곤 했다.

본관에서부터 정문을 잇는 메인 도로 양쪽의 벚나무가 휘황찬란하게 피어있었다. 아침에 등교하며 보는 벚꽃도 좋았지만, 해가 진 후의 벚꽃이 오히려 훨씬 밝아보였다. 정문 쪽은 늘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양쪽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을 나 홀로 독차지한 기분에 괜히 으쓱 거리며 걸어내려 가는 길이었다.

“어라아- 제왕?”

귀를 뚫고 들어오는 호칭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왼쪽 둔턱의 커다란 벚나무 아래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머리 하나 만큼 불쑥 솟아있는 옅은 색의 짧은 곱슬머리. 츠키시마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젓고 있었다. 뭐야, 츠키시마 군, 친구? 녀석의 옆에 앉아있는 여성은 까르르 웃으며 날 부르는 손짓을 했다. 주춤거리며 잔디를 밟고 다가서니 열 명 좀 안 되는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 동그랗게 모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들 불콰해진 얼굴이 방금 시작한 술판은 아닌 것 같았다. 법학부 세미나 신입생 환영회, 라며 호탕하게 웃는 사람들에게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츠키시마의 옆에 삐딱하게 섰다. 이 녀석, 취했나. 밖에서 이런 식으로 아는 척할 거 같진 않았는데. 앉아요, 앉아, 라며 츠키시마의 양 옆에 앉아있던 두 여성은 넉살 좋게도 소매를 잡고 끌어내렸다. 어느새 츠키시마의 곁에 한 사람 쯤 앉을 자리가 생겼다. 당황을 감추며 발을 빼려다 붙잡혀 엉거주춤 츠키시마의 옆에 앉게 되고 말았다. I 선배에게 듣던 법학부 사람들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재미없는 녀석들 투성이야. 사법시험에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성실한 녀석들.’ 신학기의 금요일, 다들 취한 건가.

건네는 술잔을 대충 받고는 츠키시마의 옆구리를 툭 취며 조용히 물어봤다. “어이, 취했냐.”

선배인지, 누군가에게 웃음 섞인 비아냥 - 듣는 상대방은 많이 취했는지 딱히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 을 날려준 츠키시마가 내 귀에 바짝 붙어 나직히 말했다.

“적당히 어울리다 빼내줘.”

츠키시마가 다가왔다 멀어진 빈 공간을 채우듯 옅은 술 내음과 섞여 샴푸 내음이 났다.

 

 

츠키시마는 계속 타이밍을 못 잡고 있는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누구 때문에 내가 여기 붙잡힌 건데.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찔렸을 무렵, 욱- 하는 마음에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도망치듯 녀석을 끌고 일어났다.

에이, 도망치기냐, 치사하다, 를 각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에게 츠키시마는 하하, 웃어주곤 일어났다. 사실 다들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앞뒤 안 맞는 말을 하고, 그 말에 또 웃고 있는 걸 보아하니 슬쩍 사라진다고 해도 1분 이내에 잊어버릴 것 같았다.

“이거 빚진 거야.”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투덜거리며 가방을 매고 정문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뭐, 얼굴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걸. 다들 전문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니.” 아, 세계를 배구로 제패할 제왕에겐 필요 없을라나, 자기가 말해놓고 혼자 낮게 웃던 녀석은 발이 걸린 듯 휘청였다.

“어이, 역시 취했냐?”

무릎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는 녀석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츠키시마의 마른 팔은 한 손에 잡혔다. 키는 커가지고 가벼운 녀석.

“정신줄 붙잡고 있으면 괜찮아.”

“그러면 집에 갈 때까지 그 정신줄 잘 붙잡고 있어.”

“뭐 어때. 내일은 주말이고. 대학 사람들도 바이바이. 게다가 꽃도 이렇게 피었잖아.”

평소와 다르게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가는 녀석은 역시 취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벚꽃은 이미 절정을 지나 질 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꽃잎이 숨 막히게 흩날렸다.

뭔지 모를 노래를 허밍으로 흥얼거리며 녀석은 걸음을 내딛었다. 걸음걸이가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너 역시 밖에서 술 마시지 마.”

“헤에, 이젠 잔소리도 하시네?”

츠키시마는 앞서가다 뒤를 흘끔 돌아보며 웃었다.

도쿄로 온 후 함께 살면서 츠키시마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녀석은 뭔가 좀 달랐다. 단순하게 지금껏 내가 츠키시마와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서 몰랐다고는 해도, 녀석이 풀어지는 모습을 보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타지에, 새로운 환경에 놓여졌단 사실에 녀석도 변하는 걸까.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걸로 선배 말처럼 정말 '친해진' 걸까. 아니면 단지 취했을 때만 나타나는 술주정같은 걸까.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가득 부유하는 꽃잎 사이에서 뒤돌아보며 웃는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아무리 뒤져보아도 없던 츠키시마였다. 까만 밤하늘 위로 불쑥 솟아있는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어깨 위로 꽃잎이 스치고 떨어졌다.

정문 쯤 다다르자 츠키시마는 머리 위 흐드러진 가지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곧 다 지겠네. 딱히 대답을 원했던 건 아닌 듯 녀석은 그래 피면 져야지, 자문자답하며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앞서가는 부슬부슬한 머리카락 사이에 꽃잎이 붙어있었다.

“머리에, 붙었어.”

츠키시마는 응? 하더니 멈춰섰다. 머리카락을 긴 손가락으로 훑었다. 하지만 정수리 뒷쪽에 붙어있는 꽃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 아니고.”

다가가며 위치를 가리키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정작 츠키시마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카락을 내주었다. 순간 당황했다. 이런 순순한 태도도 취해서 나오는 건가, 싶었다. 예전에야 10cm 가까이 차이가 났지만 어느새 눈높이가 비슷해진 녀석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매일 옆에 서서 블록 뛰거나 부딪치기만 해서 가까이에서 본 녀석의 얼굴은 늘 옆얼굴뿐이었다. 맞은편에 서서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이 녀석, 예전부터 그랬지만 생긴 건 참 옅다. 입만 열면 비죽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와서 그렇지. 음- 말 안 하고 있으면 괜찮으려나? 그래서 냉미남 소리를 듣는 건가. 조용히 서 있는 츠키시마는 선도 얇고, 피부도, 머리칼도, 심지어는 긴 속눈썹까지도 다 색소가 옅다. 요 근래 들어 간혹 녀석의 모습이 이상하게 불안해 보이는 건 이런 것들 때문에 그냥 내가 잘못 본 걸까. 내 착각인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겨우 꽃잎을 떼어내고 괜히 불편한 마음에 머리를 꾹 눌러 헝클였다. 손가락 사이로 짧은 머리카락이 감겼다. 아까도 났던 샴푸 내음이 흩날리는 무향의 벚꽃잎을 대신하듯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츠키시마는 심술 부리네, 제왕, 툴툴거렸다. 이걸로 빚진 건 없어졌어, 하며 또 혼자 척척 걸어갔다.

“야.” 빠르게 따라붙으며 옆으로 다가섰다. 츠키시마는 답도 없이 눈썹만 들썩였다.

“정신줄 챙겨.”

내 말이 뭐가 웃긴지 츠키시마는 하하- 길고 낮게 웃었다.

 

둘이서 아무 말도 없이 정문을 지나 어두운 길을 걸어 내려왔다. 밤의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가는 건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사거리의 편의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빨리 걸었나, 아닌데, 저 녀석 취해서 천천히 내려온 거 같은데. 혼자 생각하는데 츠키시마는 불쑥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

“뭐가?”

“챙겨야지, 내 정신줄.”

그렇게 말하는 츠키시마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평소의 사람 놀리는 비웃음도, 요즘 들어 가끔 보이는 기분 좋은 웃음도 아닌,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그런 미소를 짓고 있는 츠키시마가 한창 져가는 벚꽃 날리는 풍경과 닮았다고 느꼈다.








5.


 

 

아침에 일어나서 강을 따라 새벽 조깅, 그리고 맨손 트레이닝을 한 뒤 귀가. 씻고 간단히 아침 준비.

츠키시마의 방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두드리고 부른다. - 이제는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는 상태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오는 문을 밀고 들어간다. 침대 위의 크로시마는 놓여 있는 방향을 매일 조금씩 달리 한 채로 미동도 없다. 어떤 날은 좀 더 두껍고, 어떤 날은 좀 더 길쭉하다. 머리카락 끝만 불쑥 튀어나와 있는데, 이불 속에서 답답하지도 않나 싶어 문간에 기대서서 얼마나 저 모양으로 있나 지켜본 적도 있다. 꼼짝하질 않았다. 더 지켜보다간 오히려 내가 아침 수업에 지각할 판이었다. 포기했다.

이불 끝자락을 겨우 찾아내서 이불이 말린 방향의 반대쪽으로 굴린다. 한 번은 이불 양쪽 끝자락을 양손에 꼭 말아 쥐고 웅크린 녀석과 씨름하느라 아침부터 진이 다 빠졌다. 마른 손가락 사이사이에 이불을 야무지게도 틀어쥐고 있었다. 결국 그 날은 녀석이 무릎 사이에 끼운 이불 쪽을 억지로 끌어내서 아래로 당겨버렸다. 진땀이 났다. 이 자식 이미 깨어있는데 약올리려고 이러는 거 아냐? 녀석은 양손에 잡은 이불을 놓지 않고 딸려오다 침대 밑으로 상반신이 다 떠내려오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의심을 거두었다.

꾸벅꾸벅 조는 녀석에게 아침을 먹게 하기란 고행과도 같았다. 게다가 먹는 양도 새모이만큼. 이 녀석 그동안 이렇게 밖에 안 먹고 매일 아침 연습을 했던 건가. 새삼스레 다른 의미로 존경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내 닭가슴살을 조금 나누어 줘도 ‘퍽퍽해애….’ 식빵은 한 입 베어 물고는 아주 곤죽이 될 때까지 씹어대다 다시 잠들 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신체구조다. 인간은 입에 먹을 게 들어오면 보통 정신이 들지 않나. - 내가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겨우 정신을 찾아가는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다가 들은 ‘인간을 본인 기준으로 획일화시키다니, 역시 제왕은 달라’ 라는 빈정대는 말이 그 날 타인에게서 처음 들은 소리였다.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은 귀찮기 짝이 없고 정신을 차린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화를 치솟게 한다.

그나마 요거트는 작은 통이라도 하나를 다 비웠다. 어쩌다 냉장고 안에 네 개들이 플레인 요거트에 딸려온 사은품 딸기맛만 남아있던 날, 꺼내주니 평소보다 더 오물오물 잘 먹었다. 그 이후로 장 볼 때 넣는 요거트는 모조리 딸기맛이 되었다.

나 홀로 전투적인 아침들이 이어졌다. 이불과 혼연일체된 녀석을 끌어내서 식탁 앞에 앉히고, 엎드리지 못 하게 막고, 요거트를 손에 들려주고, 바나나, 스크램블 에그 같은 것들을 앞에다 들이밀었다. - 조금이라도 퍽퍽하거나 단단한 건 입에 넣으면 넘어가기까지 한 세월이 걸렸다.

츠키시마의 어머니가 존경스러웠다. 이래서 조금만 챙겨달라고 부탁하셨던 건가. 하품을 크게 하며 안경을 찾으러 다시 휘적휘적 방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츠키시마는 안경을 쓰며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도 나한테 이렇게까진 안 먹였어.’ 답했다. 그럼 뭘 먹었냐는 질문에 ‘과일 갈아마셨는데.’ 뭐가 이상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하는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녀석은 그걸 아침식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네가 먹을 건 직접 준비하지 그래?”

“그러니까 그냥 냅둬. 안 먹겠다고.”

“어.머.니.께 약속을 드렸다고- 이 자식아!!!”

결국 아침부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녀석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다 곧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뱉었다.

“알았어.”

“뭐?”

“내가 하겠다고.”

그리고는 타월을 들고 휘적휘적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도 여전히 크로시마 상태였지만, 이불을 벗겨내자 녀석은 눈도 다 못 떴으면서 부엌으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갔다. 손으로 더듬더듬 냉동실을 열더니 언제 준비해둔 건지 락앤락을 꺼내 얼음이 송송 달라붙은 과일을 꺼냈다. 하품을 크게 하며 믹서기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야! 이…!!!”

녀석은 자기 손가락도 같이 갈아버릴 뻔 했다.

그 이후로 잠이 완전히 깨기 전까지 츠키시마의 손에는 먹을 것 이외에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침부터 피를 보느니 그냥 귀찮은 게 낫겠다 싶었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행하면 습관이 되기 마련인데, 녀석은 여전히 아침에 정신을 못 차렸다. 심지어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얼마간 지켜보고서야 원인을 대충 알았다.

바쁠 거라던 츠키시마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수업, 세미나, 그리고 듣자 하니 도서관 근로에 바이트까지 시작했다. 저녁 늦게 퀭한 얼굴을 해서 들어왔다. 하루하루 갈수록 비실거렸다. 우리 학교 법학부가 여러모로 유명하고 학교 간판이긴 했지만 1학년 때부터 저렇게 힘들게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I 선배에게 물어보자 선배는 난처한 듯이 ‘나는 수업은 출석만 겨우 하고, 시험은 리포트 대체하면서 유급만 피하는 수준이라 참고가 안 될 텐데’ 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년 올라갈수록 힘들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첫 학기는 교양 기본 수업 위주여서 많이들 노는 편인데?’ 라며 ‘뭐, 윗학년 수업 미리 듣는 미친 짓만 안 하면 괜찮아’ 하고 웃었다.

츠키시마는 그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츠키시마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가 본 책상 위에 펼쳐진 책에는 알 수 없는 언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무리 법학부라고 해도 어차피 1학년 첫 학기는 교양 국어나 교양 영어, 개론 수준의 수업들이 대부분이다. 무거운 책을 들어 표지를 뒤집어 보니 법학 라틴어. 법철학, 로마법, 세미나 1회차 자료집, 그 옆으로 줄줄이 놓여있는 책들은 제목도 제목이거니와 제본된 두께만 보고도 질려버렸다. 이 두께는 살인 흉기 수준이었다.

아침에 아직 정신 못 차린 녀석은 하루 중 가장 순순히 대답한다. 말을 입안에서 한참 돌리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식탁 앞에서 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츠키시마에게 물어보니 녀석은 잠에 취한 채, 미리 들어두는 게 좋으니까 식의 말들을 웅얼거렸다.

미래엔 좋을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츠키시마에겐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느지막이 터덜터덜 들어오는 녀석은 점점 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저녁은 제대로 챙겨먹었냐는 물음에 그냥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주억거리는 게 의심스러웠다. 별 말 없이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신경 쓸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니터의 경기 영상을 다시 바라봤지만 조금 전까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박하던 경기 진행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가 불쑥 치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왜 화가 나는지 몰랐다. 하지만 아침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나마 보송한 얼굴이 밤만 되면 하얗게 질려 들어오는 걸 보면 열이 받았다.

연습을 마치고 부실에서 짐정리를 하던 I 선배는 갑자기 생각난 듯 ‘알고 보니까 츠키시마 나랑 같이 법철학 듣더라. 그 녀석 역시 머리 좋은가봐~ 요즘은 인사도 해!’ 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말에 또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잔뜩 찌푸려진 인상에 선배는 웃긴 표정이라며 사진을 찍어갔다.

찬찬히 생각해 볼수록 이상했다. 장학금을 받아야겠다면서 굳이 어려운 수업들을 미리 듣는 건 스스로 핸디캡을 껴안는 셈이다. 내가 아는 녀석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리하게 피해 나갈 수 있는 것들은 피해 나갈 녀석이었다. 지금의 츠키시마는 마치 자신을 일부러 혹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그러냐고 묻기에도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다들 자각이 없냐고 놀려대긴 했지만 나도 내가 인간관계에 서투른 편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더욱이 츠키시마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비아냥이 돌아오고, 정작 말을 고르면 쳐내기 일쑤였다. 어디까지 물어봐도 되는 건지. 친구라고 부르기엔 뭣-한 관계에서 같이 산다는 이유로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는 건지, 다가가도 되는 건지 미숙한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유 모를 답답함이 쌓여가는 날들이었다.

속에 쌓여가는 답답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꽃이 다 지기도 전에 급하게 온 손님처럼 파란 잎들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도, 동네도, 매일 아침의 강변도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나무도, 하늘도, 강도 온통 푸르렀다. 넘쳐나다 못 해 뿜어낼 지경이었다. 새로 난 잎들이 햇살을 받아 바람이 불 때마다 싸락거리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반사광에 눈이 부셨다.

도쿄의 여름은 빨리 오기 시작했다.

 

*

 

주말을 끼고 H 대학과 연습 시합 겸 합숙 일정이 잡혔다. 대학 리그의 또 다른 강호인 대학이다.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없는 동안 츠키시마 녀석은 아침을 안 먹을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으로선 녀석이 주말에도 학교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학교 식당에는 매끼 영양에 충실한 식사가 나온다.

금요일 아침, 짐을 챙겨 들고, 너 내가 돌아오면 밥 챙겨 먹었는지 확인할 거라고 윽박지르다시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녀석은 핏 웃으면서 신경 끄고 시합이나 하러 가시죠 배구바보, 하며 현관에 서서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

 

“헤이헤이헤-이 이거 카게야마 군 아닌가? 내 제자는 잘 지내?”

H 대학에 도착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달려든 건 안면이 있었던 보쿠토 씨였다. 직접 보는 건 1학년 봄고 이후 처음이었다. 히나타도 그렇고, 늘 넉살 좋게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사람이었다. 대화도 몇 번 나눠보지 않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벅차 인사를 꾸벅했다. 다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 쪽 팀 주장인 듯한 사람이 와서 보쿠토 씨의 뒤통수를 쥐어박고는 죄송하다며 질질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보쿠토 씨는 이야, 이따 또 보자구~ 안 봐줄 거야- 예에~ 라고 기쁜 듯이 소리쳤다. 대학에 가서도 보쿠토 씨는 2년 전 모습 그대로구나.

그 이후로 이어진 합숙 훈련, 연습 시합 내내 보쿠토 씨는 나뿐 아니라 우리 팀 사람들에게 시끌시끌 다가왔다. I 선배와는 금세 죽이 맞아서 저녁 먹은 이후에는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요즘 유행하는 듯한 노래에 이상한 가사 - ‘나는야 배구 대마왕이 될 거야’ - 를 붙여 부르며 뛰어다니다 각 팀 주장에게 각자 혼나기를 반복했다.

바쁘고 지친 와중에도 잠들기 전, 츠키시마에게 식사는 했느냐고 물었다. 첫날에는 한 글자의 답이 왔다, [응]. 이튿날은 답도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 식사 후, 간단한 오전 연습 및 합동 브리핑 후 일정은 끝이 났다. 학교로 돌아가서 다시 추가 브리핑을 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짐을 정리해 나왔다. 감독님들끼리 인사를 나누시면서 버스에 탈 때까지 잠시 짬이 난 김에 다시 라인을 보냈다. [저녁 어쩔 거야. 집에서 먹어? 아니면 오늘도 학교?] 그 위 두어개의 메시지는 다 식사했냐는 질문이었고, 츠키시마는 읽어놓고도 답이 없었다.

각 학교 팀원들끼리 웅성거리며 뭉쳐 서 있고, 짧은 일정에도 친해진 사람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보쿠토 씨가 다가왔다.

“헤-이 카게야마!”

“아, 보쿠토 씨.”

“츳키는 잘 지내?”

“네?”

보쿠토 씨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1호 제자라던 히나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츠키시마였다.

“츳키랑 같이 산다며?”

내가 말했나? 아닌데, 말한 기억이 없는데. “아… 네. 어떻게 아십니까?”

“응, 츳키가 말해줬는데?”

“연락… 하는 사이인 줄 몰랐습니다.”

뭐야, 그랬어? 보쿠토 씨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츳키가 귀염성이 좀 없긴 해도 부르면 꼬박꼬박 나타난단 말이지~ 도쿄로 대학 온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하기야 츳키는 머리 좋으니까! 저번에 개강하기 전에 다 같이 한 번 봤어. 응! 왜 예전에 도쿄에서 합숙했을 때, 그, 네코마의 주장이었던 녀석 알지? 눈 이렇게 쭉- 해서 성격 나빠 보이는 애, 걔랑 나랑 우리 세터였던 아카아시랑… 그리고 네코마의 키 큰 건방진 녀석. 그렇게 종종 봐. 암튼, 그때 물어보니까 너랑 자취한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너도 C 대학으로 간 줄 알았지~ 다음에 츳키랑 볼 때는 너도 꼭 같이 와라!!! 내 2호 제자로 삼아주지- 음하하핫!

츳키, 츳키, 츳키.

보쿠토 씨의 기세에 휘말린 건지, 끝없이 이어지는 말에 어질거렸다. 한참 말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도 겨우 타이밍을 잡아 나온 말은 저는… 세터입니다, 였다. 보쿠토 씨는 내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포지션이 뭔 상관이야! 배구를 좋아하고! 잘 하고 싶단 욕심만 있다면! 다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있어! 라며 허공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그 뒤로 어두운 표정의 H 팀 주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소싯적의 다이치 씨 같았다. 그쪽 주장은 보쿠토 씨의 삐죽삐죽 머리를 꾹 눌러 잡더니만 ‘카게야마, 미안, 시끄러웠지.’ 하며 사과했다. 황급히 아니라고 답하고는 또 끌려갈 참인 보쿠토 씨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저! 그 녀석,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누구, 츳키? 오랜만에 보긴 했지만 똑같던데.”

“그런가요.”

보쿠토 씨는 요옵, 다음에 또 보자구~!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나도 웃으며 인사하려 했지만, 내 웃는 얼굴이 제대로 나오는지 자신이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팀원들은 다들 곯아떨어졌다. 나도 역시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지만 버스가 덜컹일 때마다 주머니 안의 핸드폰에서 온 진동인 줄 알고 무심결에 깨버렸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가 보낸 메시지는 읽지 않음 상태였다.

 

*

 

이틀 하고도 한나절 만에 돌아온 집은 조용했다. 현관에 츠키시마의 운동화가 녀석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웬일이래, 생각하면서 혹시나 해 방문을 두들겨봤지만, 답도 없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아직도 밖-학교-도서관/세미나실/학부도서실 등등 어딘가에서 서식하고 있는 건가.

짐을 풀어 빨래를 간단히 돌려놓고 씻고 나오니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어야 할 텐데. 이 녀석은 가타부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주말 저녁은 집에서 먹곤 했는데.

뭘 먹을까 고민하며 냉장고를 열어보니 꽉꽉 채워놨던 딸기맛 요거트가 두어개 비어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챙겨먹긴 한 건가. 괜히 뿌듯해졌다. 안 되던 점프 서브를 처음 성공했을 때 느꼈던 거랑 좀 비슷하다.

음- 아니다. 그보단 미야기 집 골목 근처의, 나만 보면 샤아악- 털을 세우던 고양이가 언젠가부터 하악거리는 소리는 안 낸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랑 좀 더 비슷하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오늘 저녁으로 간만에 냄비 한가득 카레를 해 먹어야지. 찬장에서 인스턴트 카레를 여러 개 꺼내면서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츠키시마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전화마저도 받지 않는다면 이 맛있는 카레는 나 혼자 다 먹어버릴 테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쥐죽은 듯 조용한 집안에서 귓가에서 들리는 신호와 다른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에서 핸드폰을 약간 떼어내니 그 소리는 좀 더 잘 들렸다. 핸드폰의 기본 벨소리.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주춤주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움직였다. 부엌에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아일랜드 식탁을 끼고 돌아서 또 한 걸음, 두 걸음... 거실을 지나, 내 방을 지나, 다다른 곳은 츠키시마의 방문 앞이었다.

핸드폰을 놓고 간 건가. 전화를 끊는 순간 아까까지는 없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노크고 뭐고, 문을 확 밀고 들어갔다. 눈에 들어온 것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과 침대에 모로 누워 이불을 목 위까지 올리고서 등을 둥글게 말고 있는 츠키시마였다.

이상하다. 자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다. 공기가 기분 나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이, 츠키시마.”

대답이 없다.

“야, 너 왜 그래?”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잡아 돌렸다. 손에 잡힌 이불 아래 어깨가 뜨끈뜨끈했다. 몇 번 조심스럽게 흔드니 츠키시마는 게슴츠레 한쪽 눈만 겨우 떴다. 잘 안 보이는 듯 느리게 눈을 몇 번 꿈뻑이다 입을 열었다. …언제 왔냐. 해가 어스름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시간, 츠키시마의 방에는 붉고 노란빛이 한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키시마의 얼굴은 새하얗기만 했다. 다 갈라진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손을 짚더니 벽에 몸을 기대앉으려 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녀석은 마치 푸석하게 메마른 흙인형 같았다. 잘못 건드리면 바삭거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제대로 일어나 앉지도 못 하는 녀석의 이마에 뭐에 홀린 듯이 손을 갖다 대었다. 손바닥 아래서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말갛고 동그란 이마는 아까 잡은 어깨보다 더 뜨끈뜨끈했다.

“뭐야, 너.”

“뭐…가 뭐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너 왜 이렇게 뜨거워, 언제부터 이랬어!?”

차분히 말해보려 했지만 마지막 말은 결국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녀석은 이마를 한층 더 찌푸리며 다시 돌아누우려 했다.

“시끄러워. 머리 울려.”

양쪽 어깨를 붙잡자 녀석의 얼굴은 점점 더 구겨졌다. “아파, 이거 놔.”

“…너 언제부터 아팠어.” 입을 열면 큰소리가 또다시 튀어나올 것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녀석은 입술을 삐쭉이며 검지로 제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내 손을 툭툭 건드렸다. “지금. 제왕님 때문에 아프거든.”

“이!!” 무심코 온갖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지만 말이 되지 못 한 소리가 새어나갔다. 츠키시마는 입술을 풀며 나직하게 다시 말했다. 진짜 아프다고.

어깨를 잡은 손을 떼어내니 녀석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별 거 아냐. 속이 안 좋아서 그냥 좀…”

“너 마지막으로 먹은 거 언제야?”

녀석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나도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츠키시마는 날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점심은 먹었어?”

묵묵부답.

“아침은?”

역시나 답이 없다.

“…어제 저녁은 뭐 먹었어?”

젠장.

 

 

편의점으로 달려가 빈속에 먹일 만한 것들, 이온 드링크, 해열제 같은 것들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그리 많지 않은 양이었는데도 츠키시마는 천천히 겨우 떠먹다가 더는 못 먹겠다며 반을 남겼다. 먹는 와중에도 핏기 없이 질려 있는 얼굴에 더 먹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해열제를 삼킨 츠키시마는 비틀비틀 다시 자기 방으로 향했다. 노트북이랑 물을 들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침대에 풀썩 앉아 이불을 들어 올리던 츠키시마는 노트북을 옆에 끼고 들어오는 날 보고 눈썹을 들썩였다.

“뭐야.”

“넌 자.”

“뭐냐고 너.”

“너 자면 갈 테니까 신경 끄고 자라고.”

“네가 옆에서 버티고 있는데 잠이 오겠냐.”

“너 나 무시하는 거 잘 하잖아. 그거 해.”

하아? 하고 입을 비죽거리는 츠키시마에게 지지 않고 노려봤다. 오늘은 네가 뭐라고 해도 나도 그냥 안 넘어갈 거다. 츠키시마는 혀를 찼다.

“쳇, 맘대로 해.”

안 그래도 그럴 거다.

츠키시마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벽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돌아누운 녀석의 등을 바라보다 나도 침대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세리에 A1의 경기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 세트가 끝나갈 때쯤 옆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츠키시마의 얼굴이 어깨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야 이쪽으로 돌아앉아봐. 안 보여.”

“잔다더니만.”

츠키시마는 조그마한 입술을 한 쪽으로 밀어 올렸다.

“아까 낮에 계속 자서 잠 안 와.”

벽 쪽에서 방향을 바꿔 침대 매트릭스에 다시 등을 기대어 앉았다. 츠키시마는 엎드린 채 팔짱을 끼고 그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참 조용하던 녀석은 2세트 중반쯤 입을 열었다.

“잘 하네.”

“응, 이 팀 세터가 잘 해.”

귀 옆에서 프흣- 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츠키시마의 가느다란 손이 쑥 뻗어 나오더니 화면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아니, 세터 말고, 미들 블로커. 하하-”

“어? 어, 미들 블로커도 잘 하지.”

내 대답이 뭐가 웃긴지 츠키시마는 그러고도 한참을 혼자 킬킬거렸다.

 

 

모니터에선 양 팀의 접전이 이어졌다. 세터의 코트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어지는 초 크로스 토스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야, 봤…”

고개를 돌리며 말하다 입을 틀어막았다. 츠키시마는 엎드려 팔짱을 낀 불편한 자세로 어느새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었다. 경기에 집중하는 바람에 녀석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간병인으로는 낙제점이다.

노트북을 닫고 조심스레 이마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얼굴에 와닿은 손이 불편한지 웅얼거리며 눈썹이 살포시 움직이길래 황급히 손을 뗐다. 그래도 뭘 먹여서인지 아까만큼 나빠 보이진 않았다. 녀석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이불을 정리해서 다시 덮어주고 불을 끄고 걸어 나왔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려나.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자다가 마른 기침소리에 깼다. 혹시나 해서 녀석과 내 방문 모두 열어둔 상태로 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새벽녘부터 녀석은 마른기침을 해댔다.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고열에 끙끙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응급실에라도 가야 하나 싶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츠키시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목이 마르다는 말에 물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마저도 마시다 기침을 하는 바람에 사레에 들려 한참을 컥컥댔다. 얇은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를 식혀주었지만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기억이 생긴 이후로 이렇게 아파본 적이 없는 나는 도통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 빈속에 먹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열부터 내려야 할 것 같아 녀석을 겨우 일으켜 앉히고 해열제를 먹였다. 팔에 기댄 녀석의 몸이 온통 뜨끈뜨끈했다. 생전 없던 겁이 덜컥 났다.

한참을 끙끙거리던 녀석의 숨소리가 어느새 조금 편안해졌다. 내 등줄기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어둑했던 방안은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벌써 동틀 녘이었다.

이마를 덮고 있는 물수건을 뒤집어 올려주고는 침대 머리맡에 팔을 기대고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밀가루 인형 같은 얼굴이었는데 아예 지금은 핏기가 없어 파르스름해 보일 지경이다. 비실비실한 녀석. 간혹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많이 아픈가. 아프겠지. 나는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려본 기억이 없다. 얼마나 아플지 상상이 잘 안 됐다. 살짝 벌린 입술은 밤새 계속된 밭은기침에 잔뜩 말라 있었다. 맨날 저 입으로 비죽한 말들을 해댔는데. 그래도 아픈 츠키시마보단 짜증나게 하는 츠키시마가 백 배 낫다. 아프지 좀 마라.

 

잠시 졸았던 것 같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기 햇빛이 눈을 찔러왔다. 불편하게 기대서 선잠을 잤던 지라 제대로 자지도 못 했지만 몸은 정확히 매일 일어나는 시각에 또 부스스하게나마 일어났다. 침대 위의 츠키시마는 간밤보단 확실히 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물수건은 이미 말라 얼굴 옆으로 떨어져 있었다. 긴장하며 이마를 짚어보니 다행히 열은 좀 내려갔다. 해가 뜨고 또 하루가 시작됐다.

 

 

월요일이니 학교에 가라는 츠키시마의 말을 무시했다. 이제는 괜찮다는 말은 들을 가치도 없었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병원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하는 그 창백한 얼굴에 녀석이 자주 날리는 비웃음을 나도 돌려줬다. 너도 속으로 부글부글 끓을 테지. 한번 당해봐라.

한여름을 향해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옷장에서 긴 팔 카디건을 꺼내 입히고 단추도 다 채웠다. 택시를 타고 근처 내과로 가는 길에 코치님에게 연락을 드리고 사정을 설명해 오늘 배구부 연습에 대해서 양해를 구했다. 녀석은 내가 통화하는 동안 계속 입을 비죽거리다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 가라고 했는…”

“조용히 하시지, 환자님.”

“누가 환자냐.”

“너.”

“아니야.”

“맞아.”

“아니야.”

“맞아.”

택시 기사님에게서 헛기침인 듯, 헛웃음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와 거기에서부터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둘 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음, 츠키시마 씨?”

“제가! 보호자입니다!!! 같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나 또 큰 소리 냈구나. 죄송하다고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츠키시마가 인상을 한껏 구기고 노려보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살풋 웃으시더니 그러면 같이 들어가 보시라고 말해주었다. 츠키시마는 온 몸으로 이 자식 가만두지 않겠다고 티를 내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지금 힘 하나도 없는 거 다 안다. 진료실로 들어가는 츠키시마의 뒤를 부리나케 따라 들어갔다.

 

*

 

츠키시마가 이제 괜찮다고 박박 우겨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병원뿐 아니라 여러 쇼핑몰이나 가게가 몰려있는 T 센터가 집에서 멀진 않았기에 동의했다. 약을 받아 나와서 버스 정류장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자 츠키시마가 흘깃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진료실에는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셨고, 그때마다 나온 츠키시마의 대답은 내 혈압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했다.

‘인플루엔자는 다행히 아닙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졌나 봅니다. 식사는 제때 하나요?’

‘…가끔 거르긴 합니다.’

‘수면 시간은 몇 시간 정도 되는지?’

‘…요즘 잠이 잘 안 와서요.’

‘환경이 바뀌면 그럴 수 있긴 합니다. 오늘은 일단 해열제랑 소염제만 처방해드릴게요. 잠을 계속 잘 못 자겠으면 수면유도제 처방을 받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일 나보다 늦게 들어오는 츠키시마에게 식사는 했느냐고 물을 때마다 녀석은 답을 얼버무렸다. 매일 아침 인간이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유독 정신을 못 차렸다.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텐데, 몰랐다. 또다시 화가 났다. 자신을 내버리고 있는 것 같은 츠키시마에게도,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묻지 못 하는 나한테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입을 뗐다.

“너…,”

내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옆에 선 츠키시마가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도 한계다. 이미 어제부터 머릿속이 복잡하고, 화가 솟았다 식었다, 짜증이 났다 가라앉았다, 반복한 데다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그리 잘나지도 않은 뇌세포들이 다 망해버린 거 같다.

“이제부터 학교에 있든 집에 있든 나랑 점심, 저녁 다 같이 먹는 거야.”

고개를 돌려 츠키시마를 바라봤다. 해쓱한 얼굴에 발끈한 표정이 올라왔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내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 않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다시 화가 난다. 이 녀석이랑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분명 화가 늘었다.

“너 얼굴 좀 봐. 그게 사람 몰골이야?”

“하아- 잘나신 제왕은 나 같은 건 사람 취급도 안 하신다?”

힘없는 와중에도 저 빈정거리는 말투는 여전하다. 그런데 갈라져서 쉰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짜증이 난다. 화가 사라지는 거 같다가도 다시 또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소리치고 싶었다. 츠키시마 이 멍청아! 멍청시마야! 히나타에게 하듯이 외쳐버리면 되는데 저 파리한 얼굴을 보니 말이 목구멍에서 걸려버렸다.

“…그런 뜻 아니야.”

목구멍에서 겨우 꺼낸 말에 츠키시마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픈 애 데리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할 말을 찾고 있는데 츠키시마가 고개를 숙이고는 뭐라고 웅얼거렸다.

“뭐라고? 못 들었어.”

“…안.”

“안?”

“미안.”

“?!!?!??”

누군가한테 듣는 미안하다는 말이 이렇게 충격적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뭐지, 햇살이 뜨거워서 잘못 들은 건가.

“저기… 지금 뭐라고 했냐?”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마주 쥐고 조물조물하고 하고 있던 츠키시마는 나를 노려보면서 하나씩 끊어 말했다.

“미.안.하.다.고.”

저 표정은 말이랑 안 맞는다. 지금 나를 눈빛으로 죽여버리겠다는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하아- 됐다, 됐어.”

츠키시마는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입이 꿍얼꿍얼 거린다. 기껏 사람이 말을 해도… 제왕은, 어쩌고 저쩌고.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뭔지. 양쪽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가려 하는 것을 억지로 끌어내리며 츠키시마를 불렀다.

“야.”

“왜.”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집에 가면 체중계 위에 세워봐야겠다. 그동안 분명 3킬로, 아니 5킬로는 빠졌을 거다. 저 핼쑥해진 볼로 여름방학 때 어머니를 보러 내려가게 할 순 없다.

“너 내 엄마 노릇하냐.”

“내가 지금껏 너 깨우고 아침 챙겨줬던 건 고열로 기억에서 지웠냐?”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고 경제학 개론 교수님이 말했다. 100일 넘게 아침저녁으로 녀석의 비아냥을 듣다 보면 나도 나름 따라 할 수 있게 된다.

츠키시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 웃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버스 정류장 옆의 카페를 가리켰다.

“저거 사가서 이따 약 먹고 열 내리면 먹든가.”

하, 정류장까지 걸어오면서 이 까페가 시야에 들어올 때쯤부터 네 녀석이 진열장에 있는 케이크 같은 것들 쳐다보던 거 나는 봤다.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더니 츠키시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뭔지는 모르겠다만,

이긴 기분에 씨익- 웃어줬다.

 

*

 

입 안이 까끌까끌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츠키시마는 놀랍게도 뭉근하게 끓인 쌀죽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약을 삼킨 녀석에게 그제야 냉장고에 넣어뒀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주니 녀석은 세상 소중한 것인 양 품에 안았다.

뭐든 간에 오물오물 잘 먹는 걸 보니 기분은 좋았다.

잠깐- 나 정말 엄마의 마음인 건가.








6.

 

 

 

도쿄의 여름은 정말 빠르게 다가왔다. 공기는 뜨겁고 습했다. 높고 파란 하늘에 커다란 구름이 몽글몽글 떠다녔다. 누가 한참 동안 주물럭거려 만들어낸 반죽처럼 구름은 온통 동글동글한 모양이었다. 하늘빛도 쨍, 햇빛도 쨍. 눈이 부셨다. 긴 낮이 지나 한참 연습을 하고 있다 보면 저녁인데도 체육관 안의 열기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졌다.

그 말인즉슨- 종강, 그리고 그 전의 정기시험이 오고 있단 뜻이었다.

감독님은 별말씀 안 하셨다. 하지만 앞으로 2주간은 공식 연습시간이 반으로 줄었고 각 과의 시험들이 몰릴 3주차에는 팀 연습이 없을 거라고 하셨다. 코치님들은 부실에 팀원들을 모아놓고 알아서 잘 사수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카게야마, 출석은 제대로 했겠지?”

비장한 분위기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만 끄덕였다. 코치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출석만 잘 해도 반은 해결됐어. 적어도 C는, 최소한 C는 사수해야 한다.”

“F만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버텨라.”

“우리 감독님은 배구 잘 한다고 인생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셔.”

“우리 감독님은 화내실 때보다 실망하실 때가 더 무섭다... 알아둬라.”

O 선배가 걱정 마시라, 상학부에는 자기가 있지 않냐며, 내 스킬을 전수해주겠다, 큰소리를 땅땅 치다가 코치님에게 '애를 망칠 셈이냐' 는 소리를 듣고 시무룩해졌다. 저 녀석들처럼 1학년 때 맘 놓고 신경 안 쓰다간 큰일난다, 초반에 잘 받아놔야 나중에 편해진다, 말을 하며 코치님은 한 구석의 선배들을 가리켰다. 엄연히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인데도 선배들은 죄인이라도 된 양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모습에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

 

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날이 더워지고서야 이 집의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다. 집의 구조 때문인지 내 방의 창문으로는 도저히 바람이 불어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워서 견디기 힘들어졌다. 저녁을 먹고 난 후인데도 해가 길어져 어두워지기까지 꽤 오래 남았다. 한낮에 비해서야 온도가 내려갔다지만 선풍기 하나로 버티기엔 방에는 더운 기운이 가득했다. 게다가 이 집 방의 창문은 모조리 다 서향이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도 그 기세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가로로 기다란 창문으로 붉은 태양빛이 쏟아 들어와 책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교재와 수업 자료들을 잔뜩 들고 거실로 나갔다. 주장에게서 받아온 꽤 널찍한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았다. 교양 영어 교재를 펼쳤지만 제일 먼저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츠키시마 공부 잘 한대며, 도와달라 그래- 룸메이트 좋단 게 뭐냐, 실실거리며 웃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설거지 당번인 츠키시마는 부엌에 서서 낮은 싱크대 위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그릇을 씻어내고 있었다.

“저기,”

“?”

마지막으로 식탁 정리를 마치고 물기를 닦으며 돌아서는 츠키시마를 불렀다. 녀석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잠시 고민하다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말했다.

“시험공부 도와줘.”

헤에-, 츠키시마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비죽 웃었다. 제왕님 급하긴 한가 보네, 먼저 이렇게 말하고. 식탁에 기대서서 얄밉게 비아냥거리던 녀석은 상쾌해 보일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맨 입으로?”

세상에 얄미움이라는 단어의 화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츠키시마 케이가 아닐까.

 

꽤나 오고 간 설전 끝에 설거지 5회와 화장실 청소 1회가 츠키시마에게 지불해야 할 과외비로 정해졌다. 녀석은 자신이 시험 볼 과목의 교재들 – 흉기로 쓸 수 있을 두께의 그 책들 - 을 들고 나오더니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펼쳐놓기 시작했다. 나도 공부는 해야 하니까 하다가 모르겠으면 그때그때 물어봐. 고등학교 때처럼 일일이 다 봐줄 순 없어. 딱 잘라 말하고는 녀석은 곧장 책장을 넘기며 공책 위에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꼼짝 않는 녀석을 보고 지지 않겠단 오기가 발동했다. 하지만 지고 싶지 않다는 것과 별개로 영어는 너무 어렵다.

책 위를 떠돌던 시선이 여기저기 갈피를 못 잡고 헤매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츠키시마의 길쭉한 한 쪽 다리는 내 옆까지 뻗어 나와 있었다. 단단히 틀어 앉아 있던 다리 사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 같아 나도 다리를 풀고 테이블 아래로 쭉 뻗어보았다. 마찬가지로 내 발끝도 츠키시마의 옆자리까지 뻗어나갔다. 한 줄 읽고, 내 발끝을 한번 쳐다보고, 책을 한 번 쳐다보고, 옆에 나와 있는 츠키시마의 발도 한번 곁눈질로 보고, 다시 펜 끝을 바라보고.

“제왕님,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기라도 해. 머리에 우겨넣으라고.”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 하고 계속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녀석은 어느새 귀신같이 내가 헤매고 있는 문장 언저리를 펜 끝으로 툭툭 두어번 쳤다.

“이걸- 다 외울 순 없잖아.” 난처하게 말했더니 녀석은 짜증을 팍 냈다. “이게 다 이해가 안 된다고?!”

뭐라 얘기하려는 찰나 드륵-, 탁자 위에 올려놓은 녀석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렸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던 녀석은 핸드폰 화면을 곁눈질로 보다 순식간에 집어 들었다. 잠시 가만히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러보던 녀석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정강이 부분을 테이블에 분명 부딪쳤는데도 – 테이블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 아픈 기색도 없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더니 녀석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 모습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넉넉한 티셔츠와 반바지는 어디 두고 멀끔하게 갈아입고 나왔다. 내가 묻는 말에는 짧게 대답을 던지고 현관으로 척척 가더니 신발을 꿰어 신었다.

“야, 어디 가.”

“잠깐 좀 밖에….”

문을 열고 나가려다 츠키시마는 현관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잠시 고민하던 츠키시마가 말했다. 늦을 지도 몰라. 그리고는 이쪽이 가타부타 얘기도 하기 전에 녀석은 급하게 문을 밀고 집을 나섰다.

 

 

두어시간이 지났지만 츠키시마는 돌아오지도 않았고 어디냐 묻는 라인을 – 예상한 대로 – 읽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연락이길래, 누굴 만나러 갔길래. 궁금증이 여름날 구름처럼 크고 뭉글게 피어올랐다. 그 크기만큼 이유 모를 짜증이 궁금구름을 먹구름처럼 까맣게 뒤엎었다. 같이 살더니만 옮았다. 녀석의 짜증이 내게 옮겨온 게 분명하다. 집중도 안 되고 머리만 아팠다. 분명히 공부를 도와주기로 약속한 츠키시마는 갑자기 나가더니 감감무소식이다. 이건 계약 위반이다. 설거지 5회는 4회로, 아니, 3회로 줄여야겠다. 더 읽으려고 해도 꼬불꼬불한 알파벳의 미로에서 헤매는 시간만 늘어났다. 안 되겠다, 한 바퀴 뛰고 와서 다시 보든가 해야지.

 

늦은 저녁에도 후덥한 기운이 남아있긴 했지만 강변에는 그래도 서늘한 공기가 간간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웃자란 풀들의 쌉쌀한 내음이 물 내음과 함께 밑에서부터 피어올라왔다. 주택이 많은 동네이니만큼 더위를 피해 강가로 산책을 나온 가족들이 꽤 있었다. 반대편으로부터 집 방향으로 뛰어올라가는 경로를 한참 따라 달려 맨션가에 다다를 때 쯤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벤치에 앉아있는 희여멀건한 형체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어이?”

달리던 속도를 줄여가며 옆으로 다가가 섰다. 벤치에 앉은 채 기다란 다리를 접어 한쪽 무릎을 세워 얼굴을 기대고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던 츠키시마는 고개를 들었다. 내 모습을 본 츠키시마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공부한대며?”

“네 녀석이 도와주기로 해놓고 뛰쳐나갔잖아. 설거지는 4회로 줄인다.”

3회라고 하려다가 직전에 4회라고 말해놓고는 곧이어 닥쳐올 녀석의 공격에 잔뜩 대비하고 긴장하고 있는데 의외로 츠키시마는 맥없이 그러던지, 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 또 이상하다.

고민하다 쭈뼛쭈뼛 벤치에 한참 공간을 두고 옆에 앉았다. “…누구 만나러 나간 거 아니었어?”

녀석은 내게 눈도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지난 합숙 중에 만난 보쿠토 씨가 츳키가 어쩌고 저쩌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얘기하는 거 보니까 친해 보이던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보쿠토 씨였어?”

너울 흘러가던 강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츠키시마가 고개를 돌렸다. 작은 얼굴 한가득 의아함이 담겨있었다.

“보쿠토 씨? 아니. 보쿠토 씨가 여기서 왜 나와?”

“어- 아니야.”

괜시리 민망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보쿠토 씨가 아니었구나. 그러면 대체 누구- “쿠로오 씨.”

내 생각을 읽은 듯 치고 들어오는 츠키시마의 말에 다시 녀석을 바라보았다. “쿠로… 그 네코마의 예전 주장이었던?”

“응.”

“여긴 왜 왔는데?”

“…….”

말하기 싫은 건가.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 모양이고. 갑자기 만나러 나가더니만, 정작 여기 이렇게 처량하게 혼자 앉아있는 건 뭐람.

벤치 앞을 사람들이 간간히 지나쳐 갔다. 대개 조용했던 강가인데 날이 더워지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비릿하고 싸한 내음이 섞여 났다. 천천히 흐르는 물 위로 강둑 양쪽의 가로등 불빛이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가끔 멀리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만치서 체육복 차림의 어린 학생들이 손에 작은 불꽃을 들고 빙빙 돌리면서 깔깔거리며 조잘거리기도 했다. 소리들이 더운 열기의 대류에 섞여들어 한 겹 멀리서 들려오는 듯 부유했다. 부유하는 거리감 먼 소리들 속에서 츠키시마의 목소리만이 예리하게 귀를 찔러 들어왔다.

“여자친구가 T약대 다닌대. 그래서 왔다가 시간이 남는다고 해서 봤어.”

한참만에야 입을 연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흐음, 연락 오자마자 부리나케 뛰어나가 놓고는 왜 상태가 안 좋지? 갑자기 와서 불러내서 기분이 별로인가? 그러면 안 나가면 됐을 걸.

딱히 뭐라 할 말도 없어 녀석을 쳐다보는데 아까는 알아채지 못 했던 작은 케이크 상자가 츠키시마의 옆에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웬 거냐고 물으니 츠키시마는 쿠로오 씨가… 라며 말 끝을 흐렸다. 한 면이 비닐 형태로 되어 있어 돌려보니 안이 얼핏 보였다. 작은 조각 케이크는 커피색에 견과류 같은 것이 뿌려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딸기가 아니네.”

“뭐?”

“넌 딸기 있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딸기 얘기가 나오자 녀석의 눈썹은 확 치켜 올라갔다. 미간 사이가 좁아져 주름이 가득 잡히고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야, 왜 노려보는 거야.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마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아는 거지 뭘 어떻게 알아.”

“배구바보도 이 정도 눈치는 있는데 말야.”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츠키시마는 한숨을 한가득 내뱉었다. 곧이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케이크 상자는 그 자리에 둔 채. 야, 이건- 하며 입을 열자 츠키시마는 냉랭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필요 없어, 라고 말했다.

뭐지, 쿠로오 씨한테 화난 건가.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그래서 또 저렇게 이상하게 구는 건가. 짜증내는 츠키시마는 늘 봐왔지만 이런 츠키시마는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좀 이상하다. 그리고 이상하게 구는 녀석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 짜증내는 츠키시마는 이제 익숙해져서인지 짜증나긴 해도 괜찮다. 하지만 이상하게 구는 츠키시마는 답답하다. 이유를 알지 못 하는 답답함은 정말이지 싫다.

“먹을 거엔 죄가 없잖아.” 선배들이 종종 했던 말이 떠올라 작은 케이크 상자를 눈높이에 들어 올려 살짝 흔들었다.

츠키시마는 한참 앞서가다 내 말에 멈춰 섰다. 돌아본 자세 그대로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고 낮게 웃기 시작했던 녀석은 자기 웃음에 취한 듯 계속 웃어댔다. 뭐야, 저 녀석, 진짜 이상해.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설마 더위 먹은 거였나. 그냥 웃는 게 아니라 아주 배를 잡고 웃어댄다. 뭐가 저렇게 웃긴 걸까.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나. 녀석치곤 너무 열심히 웃는다.

한참을 배를 잡고 웃는 녀석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같은데 아닌 것도 같다. 뱃속이 간질간질한 게 기분이 이상했다. 낮고 기분 좋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같이 웃음이 나올 것도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당혹감에 꿈틀거리는 입가를 다잡았다. 뭐지, 비웃음당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왜 이러지. 운동복 아래로 흐르는 땀이 문득 불쾌할 정도로 살갗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 근육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에 얼굴을 굳히고 겨우 입을 한쪽으로 삐죽거리며 말을 꺼냈다.

“너 요즘 웃는 포인트 이상해.”

“너야말로 요즘 너무 밀고 들어와.”

한참을 웃어대다 겨우 숨을 고르며 말하는 녀석은 그래도 벤치에 앉아있을 때보다는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는 장난스레 눈을 반짝이는 녀석의 모습은 아까만큼 이상하진 않았다.

“나는 모카 케이크 안 좋아하니까 그건 반씩 먹어야 해.”

“난… 단 거 안 좋아하는데….”

“먹을 거엔 죄가 없대며~”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핏- 웃음을 날리곤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껑충하니 크고 마른 몸에서 하얀 팔이 천천히 흔들렸다. 짧고 곱슬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쳐있는 뒤통수가 움직였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가던 츠키시마가 멈춰서 고개만 빼꼼 뒤돌아봤다. 멍하니 서 있는 날 보더니 녀석은 더위 먹었어 제왕? 가자- 하며 턱 끝을 까딱였다.

어쩌면 더위는 츠키시마가 아니라 내가 먹은 걸지도 모른다.

 







7.


 

 

“어이, 츠키시…”

아, 맞다. 츠키시마는 집에 내려갔지. 여느 아침과 같이 별생각 없이 츠키시마의 방문을 두드리러 가다 약간 열려 있는 츠키시마의 방문을 보고서 그제야 츠키시마는 미야기에 내려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먼저 종강을 한 츠키시마는 도서관 여름방학 근로 스케쥴 때문에 방학에는 오히려 집에 못 가게 생겼다며 마지막 시험을 치르자마자 집에 내려가버렸다.

어제도, 그제도 바보같이 츠키시마가 없다는 걸 잊어버리고 습관처럼 녀석이 먹을 요거트를 꺼냈다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어제 요거트를 집어넣으면서 내일은 절대 이 짓 안 한다고 분명 생각했는데 왜 자꾸 이러는 거지. 날이 더워서 정신이 없나. 그나저나 츠키시마 녀석 밥은 잘 먹고 있으려나. 간만에 집에 갔으니 가족들이 이것저것 잘 챙겨주겠지?

분명 녀석을 깨우고 아침 먹이는 게 귀찮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눈에 안 보이니 뭔가 허전하다. 시험 기간 내내 입맛이 없다고 하는 녀석을 도서관에서 끌어내서 학교 식당에서 점심도, 저녁도 같이 먹다 보니 그런 걸까.

문간에 서서 주인 없는 빈 방을 바라보다 괜히 뒷머리만 벅벅 긁으며 돌아섰다. 잘 먹고 있겠지 뭐. 나도 오늘부터는 합숙이다. 녀석이 집에 내려가 있는 이번주보다 내가 합숙 들어간 후에 돌아와서는 혼자 제대로 밥을 먹을지가 사실 더 걱정이다.

 

*

 

[오늘은 뭐 먹었어?]

[요거트 – 돼지고기 덮밥 – 된장국 정식]

목욕하고 나오니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이 노곤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하고 훈련하고 식사하고 시합하고 식사하고 브리핑하고. 온종일 배구만 하는 충실한 2주일이었다. 이것도 내일이면 끝이다.

짐 정리를 얼추 해놓고 핸드폰을 켜서 짧게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지 않아 츠키시마에게서 짧은 답이 돌아왔다. 처음엔 식사했냐는 말에 응, 이라고만 답하길래 닦달해서 이제는 매끼 뭘 먹었는지 답을 받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적이 있는 녀석이기에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 자식, 아침은 또 새모이만큼 겨우 먹었네. 그래도 세 끼를 먹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대충 잘 자라는 식의 안부 인사와 함께 내일 돌아간다고 써서 보내고는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던져넣었다. 아, 눈 감으면 곧장 잠들 것 같다.

“어이 카게야마 너도 와서 해 봐.”

아까부터 삼삼오오 모여서 시끌시끌하던 선배들이 한쪽에서 불렀다.

“이게 뭡니까.”

“이거 ‘이상형을 보여드립니다’ 앱이라고, 꽤 재밌어.”

선배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설명이라고 대충 하더니 즉답을 해야 한다고 해놓고는 곧이어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숏? 롱?”

“네?”

“으으- 카게야마아아- 짧은 머리가 좋아 긴 머리가 좋아? 빨리 대답해!”

“아, 음, 짧은 머리…요?”

대충 보아하니 여러 가지 옵션이 나열되어 있고 그중에서 하나를 5초 안에 선택해서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키는? 에... 큰... 편? 자 다음, 마른 스타일? 아니면 글래머? 아- 음- 마른... 생각해본 적도 없는 답들을 종용당하면서 대답할수록 불편한 기분이 강해졌지만 하나씩 다 선택을 하고 나서야 온통 둘러싸고 있는 선배들의 틈에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자, 네 이상형 여기 나왔다.”

화면에는 온통 짧은 머리의 키가 큰 여성들의 사진들이 나와 있었다.

“카게야마는 모델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네. 이 사람은 엄청 유명한 패션모델이지 않아? 나 여자친구가 보던 잡지에서 본 적 있는 거 같아.”

선배가 들이민 핸드폰 화면을 잡고 바라보았다. 이상형이라니…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뭔가- 익숙한 기시감이 자꾸만 스멀스멀 다가왔다. 뭐지,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왜 어디서 본 거 같은 느낌이지. 이런 외국 모델들 본 적 없는데. 어디서 스쳐 지나가다 TV 같은 데서 본 건가? 아닌데, 내가 이런 사람들을 볼 일이 없는데. 이상한 기분에 선배가 건네준 핸드폰을 잡고 화면을 스와이프해보았다. 한쪽으로 스와이프할 때마다 다들 비슷비슷한 스타일인 사람들의 클로즈업, 상반신, 전신사진이 나왔다.

이거다. 나 이런 뒷모습 본 기억이 분명 있다.

잡지 화보인 듯한 흑백의 사진 속에는 굉장히 짧은 머리카락의 동양인 모델이 커다란 재킷을 걸치고 양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뒤돌아서서는 고개만 살짝 돌려 턱을 치켜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옆에서 내가 화면을 바꿀 때마다 호들갑을 떨던 선배들이 흑백 사진 하나에서 멈추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오- 이런 스타일 좋아해? 매니쉬?”

“응? 이런 건 유니섹스라고 하는 거 아냐?”

“뭔 차이야?”

“우리한테 물어봐도 뭐 알 리가…”

옆에서 선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제대로 뇌에 입력되지 않고 그저 한 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듯 스쳐 지나갔다. 어지럽게 뒤엉켜있던 기억의 장면들이 책장을 훑듯 파라라락 펼쳐져 빠른 속도로 넘어갔다. 이거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잠깐.

방금 그거-

그거-

이거-

이 뒷모습-

가로등 불빛 아래의 뒷모습, 벚꽃 날리던 학교 정문의 뒷모습, 살짝 돌린 얼굴 위에 선으로 그린 듯한 얇은 웃음을 머금은 입술, 그 위의 서늘한 시선. 그래, 본 적 있는 모습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보았던 모습이다.

 

 

츠키시마.

 

 

손가락 사이에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이미 깔아놓은 이불 위에 떨어져 소리가 크게 나진 않았지만 핸드폰 화면을 보며 뭐라 뭐라 떠들고 있던 선배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 카게야마?”

귓속이 홧홧하다. 동시에 귀 안쪽이 멍하게 울려왔다. 분명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정적의 소리라도 들리는 것처럼 울려왔다. 그 울림을 타고 목 뒤가 찌르르 아파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왼쪽 쇄골 아래쪽이 따끔거렸다. 따끔거릴 때마다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찌르르한 아픔이 쇄골 아래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내려가 순식간에 새끼손가락까지 치달았다. 새끼손가락이 마디마다 저려왔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맺힐 것만 같았다. 손바닥 한가운데서 빠져나가지 못 하는 열이 기묘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귀 뒤에서부터 타고 오른 화한 기운이 얼굴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동시에 뒷덜미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서늘하고 하얗게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얼어버린 것처럼 뒷골이 띵- 울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푸우-우하하하하하핫!”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선배들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가득 차가던 시야가 다시 돌아오면서 뒷덜미에서부터 온 머리로 타고 오르던 화한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불 위에서 뒹굴며 웃고 있는 O 선배를 제외하고는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다.

“에…?”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이상한 소리에 선배들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맥이 빠진 듯 웃으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야, 카게야마, 그렇게 반할 정도야?”

“얼굴이 타올라서 아주 없어지겠다 야.”

“누구야 누구, 나도 좀 보자.”

선배들은 내가 떨어뜨린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던 사람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불타오른다고?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다대었다. 얼굴이 온통 뜨끈했다.

“이 사람도 모델인가?”

“그런가봐. 아, 잠깐, 여기 누르면 프로필 볼 수 있다.”

선배들은 잠깐 핸드폰을 만지더니 다시 나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아까 그 흑백 사진 속에 서있던 모델의 갖가지 모습이 있었다. 간단한 프로필과 함께 포트폴리오인지 긴 머리, 짧은 머리, 온갖 의상, 화보, 쇼에 선 듯한 모습들이 스크롤을 따라 아래로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아니었다. 이 사진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화끈거리던 얼굴은 어느새 식어버렸다.

“이 녀석들, 마지막 날이라고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얼른 자! 아니면 밤중에 로드워크 하고 싶냐!”

문을 확 열고 들어온 코치님의 불호령에 다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후다닥 누워버리는 선배들 사이에 껴서 나도 자리에 누웠다. 코치님은 한숨을 내쉬고는 불을 끄고 나갔다. 얇은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그 안에서 웅크려 모로 누웠다. 작게 키득거리며 소곤거리던 선배들의 목소리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감으면 곧장 잠들 것 같았는데 눈꺼풀을 내리누르면 까만 바탕에서 명멸하는 작은 무지갯빛에 흑백사진의 뒷모습과 그 녀석의 뒷모습이 쉴 새 없이 교차했다.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칠흑과도 같은 눈 안에 동그랗게 남은 빛의 잔상이 자꾸만 그 작은 뒤통수가 되었다. 마른 뒷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어른거렸다. 다시금 열이 차오르는 느낌에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깊은숨과 함께 더운 공기가 훅 빠져나갔다.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 잠결에 웅얼거리는 소리 위로 이름 모를 풀벌레가 날개를 비비는 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이건 그냥 그 녀석이 끼니는 잘 챙겨 먹고 있을까 하도 걱정을 하다 보니까, 그래서 그런 거다.

그런 것뿐이다.

눈을 감으면 자꾸 생각나는 것도 다 그래서다.

그런 것뿐이다.

 

*

 

“다녀왔습니다.”

작게 웅얼거리며 무거운 짐을 현관에 툭 떨궈놓고서 운동화를 벗어냈다. 베란다 문이 활짝 열려있어서인지 더운 공기긴 해도 바람이 술렁술렁 불어 들어왔다. 스포츠백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거실로 턱턱 들어갔는데,

츠키시마가 거실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롤러코스터가 급강하할 때처럼 몸 안의 내장이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 츠키시마의 이마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작게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는 이마는 조금 더운 체온이긴 했지만 열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츠키시마의 마른 손이 다가와 이마 위에 얹은 손을 쳐냈다.

“뭐야- 더워.”

“너야말로 뭐야, 여기 왜 이렇게 늘어져 있어, 깜짝 놀랐잖아.”

나른하게 방 더워… 라고 웅얼거리며 츠키시마는 누운 채로 사이드로 조금 슬금 움직이더니 맨바닥에 다시 대자로 팔다리를 펼쳤다. 이 녀석 맨날 도서관에서 살더니만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거지.

“어쩐 일로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에 안 있고?”

“방충 소독 기간” 귀찮다는 듯이 눈도 안 뜨고 말을 툭 내뱉은 녀석은 저리 가라는 듯 손만 들어 까딱거렸다.

근 3주 만에 보는 녀석은 여전히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집에 가서 잘 먹고 온 건지 볼에 약간 살이 올라온 거 같기도 했다. 녀석은 가느다랗고 기다란 팔다리를 사방으로 던져놓고는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가 그 자세 그대로 옆으로 조금씩 꿈틀꿈틀 움직였다. 덥긴 진짜 덥나 보네. 하기야 매일 어느 시간대든 쾌적한 온도와 습도 상태를 유지하는 도서관에서 살던 녀석인데 태양이 한창 기세를 발하는 이 시간대에 집에 있으면 힘들겠지.

츠키시마가 제멋대로 누워있는 모습을 잠시 서서 내려다보다 짐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지쳐도 흐트러진 모습을 잘 안 보이던 녀석이 이렇게 경계를 푼 게 좀 뿌듯했다. 짐을 풀어서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는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저 녀석이랑 나 좀 친해진 거라 생각해도 되는 건가.

빨래를 돌려놓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아까까지의 더운 공기가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대충 털면서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다 거실에 누워있는 츠키시마를 보자 언뜻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맞아- 그거다!

이 녀석은 그, 그, 고양이 같은 거다. 그 골목 모퉁이에서 마주치면 늘 털 세우던 누런 털의 고양이. 녀석이 막 얄미운 소리 해대는 게 꼭 그 고양이 털 세우던 거랑 똑같다. 그래, 그런 거였어. 그래서 밥 안 먹으면 챙겨주고 싶고, 아파 보이면 걱정되고, 나한테 경계를 푼 것 같으면 좀 기분이 좋아지고 그런 거라고. 그래서 자꾸 생각나…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마지막에 뭔가 걸린 기분에 물병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이게 아닌가. 맞는 거 같은데. 근데 완전히 다 맞는 건 아닌 것 같은 기분. 어떤 부분이 안 맞느냐고 물어보면 꼭 집어 이야기하기는 어려운데- 그냥 그랬다.

뒤꿈치를 들고 슬금슬금 누워있는 츠키시마의 옆으로 걸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츠키시마는 해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얼굴에 다다르자 처음엔 얼굴을 돌렸다가 얼마지 않아 그 쪽까지 햇빛이 비치자 바닥에서 몸을 떼지도 않은 채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저러다 아예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겠네. 고개를 들어 베란다 문과 ㄱ자로 맞닿아 있는 길고 큰 창문을 바라보았다. 남자 둘이 사는 집은 살풍경했다. 커튼을 달 걸 그랬나. 남쪽으로 나 있는 베란다와 서쪽을 향해있는 창문은 넓은 하늘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여름에는 아무래도 햇빛이 꽤 긴 시간 동안 직사로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츠키시마의 얼굴에 햇빛이 다다르자 녀석은 또 눈살을 찌푸리며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그 꾸물거리는 모양새가 초록잎을 먹고 자라는 작은 벌레 같아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테이블과 츠키시마 사이로 자리를 조용히 옮겨 앉았다. 거리를 약간 두고 앉아 몸을 대각선으로 틀고는 팔을 뒤로 뻗어 기대고 각도를 이리저리 조절하니 츠키시마의 얼굴이 내 그늘 안에 들어왔다. 잔뜩 구겨졌던 녀석의 이마가 천천히 살풋 펴지기 시작했다.

등 뒤로 사정없이 떨어지는 여름의 햇살이 뜨거웠지만 나름 괜찮았다. 불편하게 선잠을 자는 것 같았던 녀석의 숨이 규칙적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계속해서 말간 이마를 세로 지르던 주름이 사라졌으니까. 녀석이 조금씩 움직이지 않아도 됐으니까.

 

 

저녁을 먹고 나서도 녀석은 계속 거실에서 뒹굴거렸다. 보아하니 내가 합숙 가 있는 동안 거의 거실에 나와 지낸 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아주 나 없다고 신이 났었나 보다. 저 녀석은 나 없다고 허전해하지도 않았겠지.

내가 발치에서 한참 운동을 하고 있는 동안 녀석은 처음엔 정신 사납다며 뭐라 뭐라 하다가도 방에서 들고 나온 쿠션을 껴안고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더위와 습도는 저녁이 된다고 해도 그리 누그러지지 않았다. 저녁 자율 트레이닝을 마치고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훑어내며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물로만 씻어내고 금방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토독거리던 빗줄기는 금세 투다닥 하는 굵은 비가 되었다. 그렇게 습도가 높았던 게 비가 오려고 그랬던 건가. 비가 들이차는 창문을 닫고 돌아서니 녀석은 책장을 덮으며 테이블 위로 늘어졌다.

“비 오니까 좀 살겠네.”

“너도 운동 좀 해. 그렇게 골골거리지 말고.”

츠키시마는 눈을 세모꼴로 하고는 제왕 잔소리가 많아, 라고 입을 비죽거렸다. 누가 할 소릴. 녀석이야말로 잔소리 대마왕이다. 설거지한 그릇에 기름기 조오금 남아있다고 그걸로 사람을 아주 잡질 않나. 화장실에 물 때 껴있는 거 제때 청소 안 했다고 아주 질겁을 하지 않나. 그나저나 평소 같으면 더 얄밉게 웃으면서 뭐라 할 거 같은데 더운 낮에 시달려 기운이 없는 건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녀석은 다시 늘어졌다. 이 녀석, 아침뿐만 아니라 더위에도 약한 건가.

열려 있는 베란다 문을 통해 바람이 들이닥쳤다.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어놓는 바람에 녀석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흥얼거렸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방에 들어가서 노트북과 헤드폰을 갖고 나왔다.

“거실 불 끈다?”

스쳐 지나가며 던진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츠키시마는 거실 불을 끄고 앉아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헤드폰을 연결하더니 쿠션을 다시 품 안에 끌어안았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츠키시마의 안경 위로 빛의 일부만이 서렸다. 옆으로 슬쩍 가서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영화사의 로고가 화면을 가로질러 나타났다. 빨간 화면을 꽉 채운 한자들이 나타났다 곧이어 사라졌다. 얼마지 않아 약간 낡은 듯한 느낌이 드는 영상에 꽃무늬 가득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입을 움직이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래로 자막이 나왔지만 어떤 소리일지 궁금했다. 아예 츠키시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툭 쳤다. 츠키시마는 눈썹 끝을 추켜올리며 눈동자만 슬쩍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볼래.”

의아한 표정을 짓곤 웬일이래, 라고 입만 벙긋거린 녀석은 노트북에 연결된 헤드폰 잭을 빼주었다. 그리고는 옆으로 슬쩍 움직여서 자리를 내주었다.

 

영화는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다. 아름다운 여성은 매번 다른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 모양과 몸에 꼭 맞춘 듯한 옷차림이었다. 그리고는 양복 차림의 남성이 나왔다. 그도 역시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반듯하게 포마드로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성과 남성은 만나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어인 듯했다.

영화엔 천천히 흘러가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성의 뒷모습이 많이 나왔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을 내려갔다 올라가는 여성은 그렇게 화려한 색채로 가득한 옷을 입었지만 검은 그림자에 덮여 그저 형체만 드러날 뿐이었다. 뭔지 모를 현악기의 소리가 사람들의 움직임만큼이나 느리게 흘렀다. 여성이 지나간 골목길을 양복 차림의 남성도 걸어 내려갔다. 가끔 골목에서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눴다.

여성도, 남성도 각자의 일상이 있었다. 일상은 그 나름의 속도를 유지하며 흘러가는 것 같았는데 중간중간 이해 못 할 장면들이 섞여 있었다. 소리만 들려오는 복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벽에 걸린 거울. 그리고 다시 나른한 현악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속도가 느려졌다. 비가 왔고 남성은 벽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그들은 또 골목에서 스쳐 지나가며 인사했다.

그들은 함께 식사했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말이 많지도 않았다.

붉은 톤이 많이 깔린 화면이었다. 옅은 홍빛이 섞인 복도, 붉은 나무로 된 벽, 같은 색의 가죽으로 덮인 소파, 새빨간 커튼, 여성의 붉은 드레스.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유독 느렸다.

시계가 많이 나왔다.

간혹 폭우가 쏟아졌다.

가끔 두 사람의 손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들은 더 많이 무언가를 먹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여성은 남성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또 비가 왔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흐느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시간을 만들어 보냈다.

새빨간 커튼이 바람에 너울져 흩날렸다.

미세하게 떨리던 여성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얼굴을 따라 길을 내며 흘러내리는 장면에서였다. 분명 닿아있지 않았는데도 움찔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공기가 흔들린 것만 같았다. 천천히, 엄청 천천히 화면에 고정되어있던 눈동자를 돌렸다. 무릎을 세워 품 안의 쿠션과 함께 껴안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댄 츠키시마의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쉴 새 없이 떨리는 여성의 속눈썹처럼 츠키시마의 속눈썹도 젖어 흔들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안경 유리 위에 서리는 빛이 온통 튀었다. 부풀어 영글었던 눈동자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았다. 온몸이 돌로 만든 듯 굳어버렸다. 시선을 돌려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지만 아까까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럽게 굳은 것 같아 움직이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들킬 것만 같았다.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기분을?

시간이 천천히 흘러 오래된 유적 앞에 선 남성은 벽에 난 구멍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고는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입 앞에 모은 손 뒤로 그의 턱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떠난 후의 구멍은 흙과 풀로 틀어막혀 있었다.

처음과 같이 화면을 가득 메운 빨간색 위로 하얀색의 完 이 떠올랐다.

 

그제야 녀석은 깊은숨을 뱉어내며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소리가 없어 정적이라 부르는 것일 텐데 나는 정작 그 정적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뭐라도 해서 이 정적을 흩어버려야 했다.

“이거 무슨 내용이야?”

알쏭달쏭하긴 했어도 중간쯤까지는 알 듯했는데 녀석의 눈을 본 이후로 영화의 내용은 온통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평소처럼 비죽이 웃으면서 그것도 모르냐며 못되게 굴 줄 알았는데 녀석은 의외로 아무 말 없이 붉은 화면 위로 올라가는 하얀 한자들을 보더니만 천천히 입을 떼었다.

“끝나버려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영화 속 알 수 없는 장면들의 교차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다시 물었다.

“그거야 모든 시간이 그렇잖아?”

녀석은 서린 안경 너머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하도 날카로워서 순간 움찔했다. 그래놓고는 괜스레 화가 울컥 났다. 뭐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저렇게 쳐다봐. 이 녀석은 맨날 이런 식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있다 막상 말을 건네면 비죽 웃으며 사람 속 긁는 말들만 하다가 혼자 웃다가 금세 또 짜증을 낸다. 아주 제멋대로다. 날아오는 시선을 말없이 마주 노려보자 녀석은 또 한숨을 내뱉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기억에 대한 거야.”

“가장 아름답다고?”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츠키시마는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 듯 마지막 말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뭐, 제왕한테는 마지막 봄고쯤 되려나. 녀석은 혼자 중얼거렸다. 노트북을 접고 주섬주섬 챙겨 일어나려는 녀석의 손목을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뭐야, 왜 이래?”

“너한텐… 아니야?”

“뭐가?”

“너한텐 봄고가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아니야?”

일어나려던 자세에서 손목을 잡혀 엉거주춤하게 멈춰버린 녀석이 짜증을 팍 냈다. 녀석의 짜증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내 화도 터졌다. 나도 모르게 마지막엔 목소리가 커졌다. 순간 멈칫했던 녀석이 손을 잡아 빼며 말했다.

“나한텐, 아니야.”

괜히 꼬장부리지 말고 주무셔, 노트북과 헤드폰, 쿠션을 품에 챙겨 들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영화에서 수도 없이 나온 남성과 여성, 그들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그리고 흑백 사진 속의 모델과도 겹쳐졌다. 기억 속에 몇 번이나 있었던 츠키시마의 뒷모습이 지금과 겹쳐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녀석. 말로 하면 될 것을 절대 말하지 않는 녀석. 그런 주제에 이쪽에서 찌르면 있는 대로 발끈해대는 녀석. 얼굴은 늘 평온한 척하고 있지만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하고 있다는 거 이제는 안다. 엔노시타 씨가 했던 말이 조금 이해될 거 같기도 했다. ‘츠키시마는 이리저리 배배 꼬아.’ 솔직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솔직하지 않은 녀석. 미운 말은 잘만 하면서.

짧은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가는 녀석의 뒤에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지나간 게 가장 아름다우면!”

내 목소리에 녀석은 문간에 잠시 멈춰섰다.

“앞으로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거 만들고 보내면 되지! 바보냐?!”

몸을 반쯤 돌려 나를 쳐다보는 츠키시마는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명확하게 보였다. 잔뜩 구겨져 있었으니까. 녀석은 아랫입술을 깊게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츠키시마는 말을 짓이기듯 내뱉으며 다시 돌아섰다.

“너 진짜 짜증나.”

츠키시마의 뒤로 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비바람은 아까보다 더 거세고 서늘하게 불어 들어왔지만 정수리까지 열이 올라왔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벅벅 긁어댔지만 열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열린 베란다로 바람이 불어닥칠 때마다 콘크리트 내음을 품고 피어오르는 습기 가득한 물 내음이 어두운 거실을 어지럽혔다.

 







8.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비가 세차게 오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녀석을 깨웠고 말없이 식탁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했다. 나는 연습을 하러, 녀석은 도서관에 가기 위해 함께 학교로 걸어갔다. 아무 말 없이 걷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까만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 동네의 고양이 중에서도 유독 아무 소리도 안 내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이였다. 습관적으로 쭛쭛- 소리를 냈다. 고양이는 눈이 마주친 것만큼이나 무심하게 몸을 훌쩍 날려 사라졌다. 옆에서 걷던 녀석이 낮고 짧게 웃었다. 그 이후로 고양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자, 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표현을 하길래 타박하며 아웅다웅하다 어느새 다다른 본관 앞에서 헤어졌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언제나처럼 녀석이 짜증을 낸 것뿐이라고. 녀석에게서 짜증난다는 말을 들은 게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온몸으로 표현했던 적도 많았다. 생각해보면 녀석과는 첫 만남부터가 그랬다. 눈을 잔뜩 휘며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비아냥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 내음 가득했던 말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차라리 비꼬는 말은 익숙했다. 하지만 녀석이 하나씩 하나씩 무겁게 뱉은 그 날의 말은 가라앉을 법하면 무심결에 다시 떠올라 가슴을 진탕처럼 어지럽혔다. 내가 한 말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걸까. 왜 그 녀석은 그렇게 화를 낸 걸까.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숨이 막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끝이 없을 것 같던 여름이 가고 있었다.

 

*

 

개강 전 세미나 모임이 있다며 나간 츠키시마는 저녁을 먹고 온다고 연락을 했다. 코치님이 찾아준 브라질 1부 리그 영상을 한참 돌려보았다. 어느새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0시쯤이었다. 많이 늦으려나- 생각하는 순간 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도 보고 물도 마실 겸 부엌으로 향하는데 뭔가 현관에서 꾸물꾸물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문 너머로 보이는 형체가 현관에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뭐하는 건가 싶어서 부엌과 현관을 나누는 미닫이문을 툭 밀어 열었다. 츠키시마는 양손 가득히 짐을 주렁주렁 들고 있었다. 분명 아침엔 가방 하나 들고 나갔는데 저건 다 뭐지.

“그건 다…!”

묻는 말을 하려다 알아차렸다. 아니, 입을 열어서 말을 앞으로 내보내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말이 빠져나가기 전에 입을 다물어야 했는데 뇌가 늦게 반응하면서 말은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갔고 겨우 마지막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이 녀석- 생일이다 오늘.

양손에 작은 케이크 상자와 과자나 군것질거리 같은 것들이 잔뜩 든 종이가방을 든 츠키시마는 말을 하다 멈춘 내게는 관심도 없이 발뒤꿈치만 탁탁 쳐서 겨우 신발을 벗어냈다. 신발을 벗고 올라선 츠키시마는 멀거니 서서 굳어버린 나에게 한 손에 들린 짐을 떠안겼다.

“어어?”

“도와주려고 거기 서 있는 거 아니셨어?”

싱긋 웃으면서 말문을 막아놓고는 츠키시마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짐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다 나도 엉겁결에 떠안은 종이가방 안에 있는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녀석은 케이크 상자를 빼꼼 열어보더니 흐응~ 하고 알 수 없는 반응을 했다. 다시 조심스레 닫아서 냉장고에 집어넣는 뒷모습을 보니 싫은 건 아닌가 보다. 온갖 종류의 과자와 초콜릿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하나씩 확인하는 녀석의 얼굴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조금 가벼운 공기가 주변에 흘렀다. 기분이 좋은 건가.

그나저나,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갈하고 깔끔한 글씨체로 ‘츠키시마 군, 생일 축하해!’ 라고 쓴 포스트잇이 붙은 판 초콜릿이 있길래 그대로 츠키시마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저기에 각기 다른 글씨체로 다양하게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짧은 글귀들이 적힌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쓴 사람의 이름도 써져있지 않은 가벼운 축하문구였지만 츠키시마는 조심스레 따로 떼어내서 한켠에 모아두었다.

세미나의 사람들이 여러모로 많이 챙겨주고 아끼는 모양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녀석은 그 건방진 말투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연상의 선수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먼저 손 내밀지 않는 타입인데다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 학교의 선배들뿐 아니라 다른 학교의 선수들도 녀석에게 먼저 다가오곤 했다. 나도 이 녀석보다 한 살이라도 많았더라면 조금 더 편하게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음?”

종이가방 맨 아래쪽에 둥글게 말려 깔려있던 건 두툼한 A4 용지를 철한 종이뭉치였다. 종이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것이 꽤 여러 번 들춰보았던 것 같았다. 냉장고에 이것저것 넣고는 돌아서던 츠키시마는 내 손에 들린 걸 보곤 헛-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손을 내밀길래 건네주었더니 표지부터 보고는 다음 장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입술을 앙다물고 미간을 좁히긴 했지만, 눈이… 반짝거린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저런 반응인가 궁금해져 슬쩍 옆에 서서 곁눈으로 읽어보았다.

족보다. 알 수 없는 한자들이 가득했지만,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저건 족보다.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고 웃고 선 녀석은 한 장씩 급하게 넘겨보았다.

“아야-!”

그러더니만 저 사달이 났다. 겉표지는 꽤나 너덜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중간중간 끼워진 듯한 얼마 안 된 새 종이에 손가락을 베어버렸다. 츠키시마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족보를 식탁에 내려놓고 왼손으로 다시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레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아무거나 넣지 마.”

손목을 잡아 멈추며 말하자 녀석은 쳇 하고 혀를 찼다. 잔소리 제왕이군. 툴툴거리는 녀석은 오늘따라 애 같아 보였다. 약 상자를 들고 왔다.

“그냥 베인 거거든.”

“조용히 하시지 환자님.”

본인이 불린 호칭에 츠키시마는 어이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또 픽- 웃었다. 이상한 표정. 베인 상처는 깊지 않아 맺힌 피를 닦아내고 약을 살짝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흐응-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검지 마디에 붙인 밴드를 보던 츠키시마는 날 보며 말을 이었다.

“너, 생각보다…”

“?”

“아니야.”

“뭐야,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자른 츠키시마는 과자랑 초콜릿 몇 개를 헤집더니 내게 던져주었다. 너무 많으니까 그건 너 먹어, 치료값, 원래 단 것을 비롯한 탄수화물류는 별로 안 먹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이미 자정까지 한두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애초에 생일이란 거 잘 챙기지도 않는 성격이어서 잊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도 뭔가 챙겨주고 싶었다. 작은 주전부리들에 살짝 기분 좋아 보이던 츠키시마, 짧은 축하문구들을 따로 챙겨놓는 츠키시마, 족보를 보고 눈을 반짝 빛냈던 츠키시마. 나도 뭔가 주고 싶다. 그런데 뭘 줘야 하는 거지. 먹을 건 이미 잔뜩 받은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시각이면 케이크를 살 수 있을 만한 까페고 베이커리고 다 문을 닫았다. 괜한 오기긴 하지만 오늘을 넘겨버리기 전에 뭔가 주고 싶다.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 뭔가 저 녀석에게 필요할 만한 것.

문득 아침에 정문 다다를 때쯤이면 때 아닌 늦더위에 기진맥진하던 츠키시마의 모습과 얼마 전 부주장이 새로 스쿠터를 사서 더 이상 안 탄다며 내게 떠안기듯 준 자전거가 스치듯 떠올랐다.

간만에 내 머리가 좋은 일을 해냈다. 의기양양하게 츠키시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야, 나도 선물 준다.”

“헤에?”

츠키시마는 의외라는 듯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건가 싶었는지 여기저기 훑어보던 녀석은 뭔데, 물었다.

“내가 개강하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너 본관까지 태워다준다.”

내 말에 츠키시마는 10초간 말이 없었다. 그 10초 동안 녀석의 눈썹 사이가 점점 좁혀들었다. 미간 사이에 주름이 하나 둘 맺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그랗던 눈이 점점 가느다래졌다. 결국 되묻는 녀석의 입술 한 쪽이 바르르 떨렸다.

“……뭐라고?”

“저걸로 내가 너 본관까지 태워다주겠다고. 걸어가는 거 힘들어했잖아.”

딱히 둘 데가 없어 베란다에 놓아두었던 자전거를 당당하게 가리켰다. 내가 생각해냈지만 참 자랑스러웠다. 등교할 때마다 힘들어하는 녀석한테 필요한 선물이고, 자정을 넘기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한테도 아침 워밍업 정도로 도움이 될 거다!

츠키시마는 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베란다에 기대 있는 자전거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들었음에도 녀석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더니만 낮고 음산하게 답했다.

“필요 없어.”

“뭐?”

“필요 없다고.”

“왜? 너 본관 도착할 때쯤이면 힘들잖아. 내가 선물로 더위 가실 때까지 태워다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짜증을 잔뜩 섞인 녀석의 말에 나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왜 말이 안 돼?”

“낯부끄럽게 어떻게 저 낡은 자전거에 190짜리 남자 둘이 타? 아니, 잠깐, 그보다 너 그 경사길에 날 태워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 아무리 배구바보라지만 이렇게 단순무식할 줄이야. 아침저녁 운동만 하더니만 근육뇌가 더 단단해진 거 아냐?”

처음엔 짜증일색이더니만 말할수록 빙글거리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방금 녀석이 부리던 짜증이 옮아온 게 분명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기껏 사람이 생각해서 도움이 될 만한 걸 생각해냈더니만.

“야-! 내가 비실비실한 너 하나 못 끌고 올라갈 거 같냐?”

“응. 절대- 절대- 못 올라가. 웃기는 소리 그만 하고 잠꼬대는 들어가서 자면서 하시지.”

츠키시마는 아주 단호하게 자신이 하는 말에 맞춰 고개를 저었다. 눈꼬리를 잔뜩 휘면서 아주 상큼하게 웃어젖혔다. 손을 훠이훠이 흔들면서 이제 그만 들어가라는 식으로 말했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주먹이 쥐어졌다.

“올라가면 어쩔래, 본관까지 한 번도 안 쉬고 올라가면 어쩔 거냐고?!”

“하! 절대 못 올라간다니까 그러네.”

“아, 그러니까 올라가면 어쩔 거냐고?”

“하하, 야, 네가 저걸로 한 번도 안 쉬고 그 경사길을 올라가면 내가 몇 달이고 뒤에 타고 다녀주마.”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다.”

“나 참, 그러는 제왕님께선 올라가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어쩌실 건가요?”

극존칭을 쓰며 한껏 잘난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리는 츠키시마를 보자 머릿속에서 무언가 뻥- 하고 터져버렸다.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그냥 말이 튀어나왔다.

“앞으로 세 달간 설거지 내가 다 한다!!! 이 자식아!”

한순간에 뱉어놓고서 숨을 쉭쉭 쉬다가 그제야 아, 세 달은 좀 긴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미 나온 말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다. 내 말에 츠키시마는 차갑게 눈을 마주쳐왔다.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가자.”

“어딜?”

베란다로 성큼성큼 걸어가 자전거를 들고 나왔다.

“누가 이기는지 봐야지.”

 

*

 

이미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원래도 차량이 많지 않았던 사거리에는 간간이 차가 신호에 따라 멈춰섰다 다시 지나쳤다. 사거리의 패밀리마트 옆에서 비장하게 섰다. 조건은 경사가 시작되는 사거리에서부터 본관까지 멈춰 서지 않고 올라갈 것. 굽이 도는 경사길을 한번 바라보고는 옆에 선 츠키시마를 쳐다봤다. 역시나 앞에 놓인 길을 보고 있던 츠키시마는 내 시선에 돌아봤다. 후우- 하고 한숨을 한 번 쉰 츠키시마는 가다가 힘들다고 내팽개치진 말아 주시죠, 라며 생긋 웃었다. 저렇게 웃으면서 사람 속 뒤집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전 지구에 츠키시마 케이 한 명뿐일 거다.

나보다 큰 부주장이 타던 자전거는 다행히 높이는 조정 안 해도 되는 정도였다. 다만 뒤에 앉은 츠키시마는 다리가 끌려서 불편하다며 툴툴거렸다. 이미 저리 발을 옮기던 츠키시마는 겨우 무릎을 접어 발을 올릴 곳을 찾았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발을 올렸다.

“간다.”

처음은 놀랍도록 수월했다. 출발하자 뒤로 약간 쏠리는 무게감이 있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다리를 한 바퀴 돌리자 곧 사라졌다. 뭐야, 이 녀석 너무 가벼워. 그토록 열심히 먹였는데도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이야? 츠키시마가 그 큰 키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는 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인 건데. 묘한 안도감이랑 묘한 화가 뒤섞여 들었다. 요즘 이 녀석이랑 얽히면 다 이런 식이다. 전혀 다른 감정들이 공존하면서 섞여버린다. 애초에 이렇게 화가 나게 만드는 사람은 이 녀석을 만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첫번째 코너까지만 해도 얄밉게 흥얼거리던 츠키시마는 크게 도는 두번째 코너에서는 움찔하면서 옷의 허리께를 잡아당겼다. 티셔츠가 뒤로 당겨지면서 어깨랑 목 쪽까지 당겨졌다. 숨이 헉-하고 목에 걸려 나도 모르게 호통치듯 소리를 높였다.

“잡을 거면 똑바로 잡아! 방해하지 말고!”

뭐라고 뒤에서 꿍얼거리던 츠키시마는 곧 양손으로 허리 양쪽을 붙잡았다. 순간 나도 놀랄 정도로 배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졌다. 이 경사길이 원래 이렇게 숨찼던 건가. 아직 절반밖에 안 왔는데. 뒤에 앉은 츠키시마가 여전히 그리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심장이 귓가에서 쿵쿵 요동쳤다. 뭐야 안 되겠어. 내일부턴 코치님에게 부탁해서 폐활량 올리고 심근 강화하는 메뉴도 추가해야겠다.

 

막판엔 거의 양쪽으로 휘청거리면서 올라온 것 같았다. 츠키시마는 처음 자전거가 휘청거릴 땐 질겁하며 허리를 잡아대다 나중엔 여유가 생겼는지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3분 가량 만에 본관 앞에 다다랐다. 아무도 없는 휑뎅그레한 본관 앞에 도착해 츠키시마가 내리자마자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본관 앞 나무를 둥그렇게 둘러싼 놓인 벤치에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올라오는 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휘청거릴 때마다 츠키시마가 손가락에 힘을 주며 허리를 잡아 오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배에 잔뜩 힘을 준 채로 쉴 새 없이 페달을 밟는 바람에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온통 뻐근하게 당겨왔다.

이 상황을 초래한 츠키시마는 자기가 한 짓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다란 달을 등지고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는 서서 정신없이 숨을 내쉬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잔뜩 그림자를 만들어낸 그 얼굴에 그려진 뚱한 표정이 맘에 들지 않아 손가락을 척 들어 가리켰다.

“야- 하… 하아… 내, 내가… 이겼다.”

“흐음-“

“너… 이제 군말 않고… 타고 다니는 거다.”

“쳇” 쳇쳇시마.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던 츠키시마는 숨을 돌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날 보더니 장난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제왕은 정말 바보네.”

“뭐야?”

“지면 당연히 안 좋고, 이겨도 좋을 거 없는 조건의 내기를 받아들이다니. 참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사고방식이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따라할래야 따라할 수조차 없겠어.”

뭐…라는 거…

발끈-하며 화가 중간쯤 올라왔다가 제풀에 다시 스르륵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저산소 상태로 시달리던 뇌가 천천히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길 경우 - 츠키시마가 군말없이 내 뒤에 타고 등교한다.

내가 질 경우 - 세 달간 설거지를 한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노동력을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해야 하는 건데. 경제학도로선 낙제점이지 않을까나.”

내 생각을 읽은 듯 설명을 덧붙이며 츠키시마는 해사하게 웃었다. 멍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이런 녀석의 최상급 비아냥 미소에 화가 날 텐데. 역시 여전히 산소가 부족한 건가.

멍한 머리에서 통제를 벗어난 듯 엉뚱한 생각들이 튀어 올랐다.

이 녀석은 그러고 보니 늘 예쁘게 웃었더랬지. 녀석의 머리 위까지 휘영청하게 자란 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은 잎맥을 따라 조금씩 색이 변하고 있었다. 깊은 밤하늘 구름 사이에 숨은 달이 구름 사이에 숨어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 끝에 걸렸다.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다. 서늘한 바람이었다. 잎사귀 사이를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언젠가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속의 이 녀석의 웃음은 지금과는 좀 달랐다. 다시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하얗게 웃고 선 츠키시마의 얼굴을 아래서 올려다보는 게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츠키시마의 머리 뒤에 걸린 구름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 빠르게, 다시 천천히 흘렀다. 숨을 쉴 때마다 구름 뒤의 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달빛이 가슴 안에 들어찼다. 들숨을 따라 들어온 달이 빠져나가지 못 하고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숨쉬기가 조금 힘들어졌다.

아, 그래, 고열에 고통스러워하던 이 녀석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더 힘들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빨리 흘러가서 아침이 오길 바랐다.

지금은 시간이 이상하게 흐른다. 느린 것 같다. 멈춘 것 같다. 눈으로는 해사하게 웃는 츠키시마를 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츠키시마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멈추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굴던 츠키시마.

 

이상한 나.

 

“…상관없어.”

츠키시마는 평소와 같은 반응이 아니자 눈썹을 들썩였다.

“너한테 주는 선물이니까 상관없어.”

여전히 귓가가 소란스럽게 술렁였지만 한껏 부풀어 올라 가슴 안쪽을 꽉 채운 듯 했던 것은 말을 할수록 조금씩 가라앉았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9. 27.

시계 옆면의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11: 09.

순간 웃음이 튀어나왔다. 씩 웃으며 다시 츠키시마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나온 웃음에 분명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이겼다.

“생일 축하해, 츠키시마.”

나뭇잎 끝 마냥 순식간에 귀 끝이 빨개지는 녀석이,

나에게도 선물이었다.

 


 





9.


 

 

알아차리는 순간은 찰나다.

그리고 알고 나면 몰랐던 때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왜.

잔뜩 차올랐던 달이 이울었다 다시 차오르는 동안 뒤척이는 밤들이 찾아왔다. 눈만 감으면 잠들곤 했는데 쉽사리 잠에 빠져들지 못 했다. 낮 동안 훈련 시간을 늘리고 강도도 높였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깨어있는 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코치님에게 오버 워크라며 억지로 등을 떠밀려 쫓겨난 날, 결국 이불을 걷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익숙한 형체들이 떠올랐다.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벽에 뒷머리를 비비면서 머리에 떠오른 가장 첫 질문을 던져보았다. 이리 던졌다 저리 던졌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내팽개쳤다. 설령 답을 찾는다 해도 현 상황에 대해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왜인지 알게 된다면, 그런 다음엔 대체 뭘 어쩔 거지. 왜, 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음 질문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할 때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최대한 하나씩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가을, 여름, 봄, 겨울. 하지만 이미 알고 난 상태에서 떠올리는 기억들은 이미 현재의 감정이 덧씌워진 것처럼 하나같이 은은하게 빛나기만 했다. 그 때도 실제로 이렇게 빛나던 장면을 기억한 건지, 아니면 내가 저장해놓은 모습에 덧칠한 건지 분간해낼 수 없었다. 어딘가 전환점이 있었던 게 아닐까 따라 올라가 보았지만 텅 빈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싸늘한 겨울 공기까지 가닿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간 고등학교 시절까지, 심지어 최악의 첫만남까지 되짚어볼 기세였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뒤집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도 왜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게다가 기억을 뒤질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려서 밤을 더 멀리 내쫓아버리기만 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질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장외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찾아든 질문- 어떻게 할 것인가.

앞의 질문들처럼 의미가 없는 것도, 답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떤 답도 쉽사리 튀어나오지 못 할 뿐이었다. 선택지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 앞에 서서 어느 것도 고를 수가 없었다. 결국 외면하고 무거운 질문과 선택지들을 한켠으로 주욱 밀어버렸다.

 

 

10월 개강. 약속대로 아침에 자전거를 꺼내 들었다.

월요일, 자전거를 꺼내 들고 나오자 츠키시마는 어김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학교로 올라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이 녀석 확실히 주말 지나고 나면 상태가 안 좋아진다. 성격이 더러워져.

화요일, 전날보단 자전거를 바라보는 녀석의 이마 주름 개수가 줄었다.

수요일, 출발했을 때부터 계속 뒤에서 승차감이 별로라고 꿍얼거리길래 짜증이 나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코너를 돌 때 여느 때보다 훨씬 휘청거리고 말았다. 츠키시마는 입으로는 여전히 꿍얼거렸지만 분명 손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잡아 왔다. 이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심장에 좋지 않았다.

목요일, 츠키시마는 평소보다 정신을 못 차렸다. 집을 나설 때까지도 퀭한 눈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몇 번 말을 했는데도 또 늦게 잤나 보다.

금요일, 츠키시마는 엉뚱하게도 뒤쪽을 보게끔 거꾸로 앉았다. 위험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올라가는 경사에서 등에 등이 맞닿게 기대면서 어라, 설마 힘들어서 못 간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하며 짓궂게 웃어댔다. 본인은 무겁게 누른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했던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곤란한 건 무게감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위험했다.

토요일, 주말인데도 도서실에 간다는 츠키시마를 태워다주느라 나도 함께 학교로 향했다. 주말 아침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제법 익숙해졌는지 츠키시마는 뒤에 앉아서 내 등 위에 핸드폰을 포개놓고는 흔들지 말라고 잔소리까지 해댔다. 아니 어떻게 몸이 안 흔들리게 자전거를 탈 수 있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일요일 아침, 요거트 하나만 겨우 비운 츠키시마는 하품을 크게 하더니 등받이도 없는 스툴형 의자 째로 끌고 벽에 가 붙어선 한쪽 어깨를 대고는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오늘은 학교에 안 가도 되나 보지. 졸고 있는 츠키시마를 바라보았다. 아침이면 침대에서 그대로 끌려 나오는 바람에 안경을 안 쓴 맨얼굴에 늘 반밖에 못 뜬 눈을 하고선 새 모이 쪼듯 먹는 녀석이었다. 요즘은 조금 정신을 빨리 차린다 싶었는데 주말이면 어김없이 원상복귀였다. 그래도 몇 달 전보단 볼이 살짝 통통해졌다. 흐뭇한 마음에 보고 있는데 꾸벅 졸던 녀석이 크게 흔들리면서 그대로 의자 째 넘어갈 뻔했다. 의자가 덜컥거리면서 소스라치는 녀석을 식탁 너머로 붙잡느라 아침부터 좁은 식탁 위가 난장판이 되었다. 덤으로 다 먹지도 못 한 내 닭가슴살은 바닥으로 직행했다. 젠장.

다시 돌아온 월요일 아침,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현관으로 향하는데 츠키시마가 뒤에서 불러세웠다. “저거 안 챙겨?”

아침부터 방싯 웃으면서 츠키시마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웬일로 아침인데 저기압이 아니지. 엄청 예쁘게 웃어대네, 생각하며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그 끝에는 베란다에 놓인 자전거가 서 있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웃고 있는 얼굴을 쳐다봤더니 츠키시마는 어라, 기억 못 하나 봐? 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기면 몇 달이고 타고 다녀주겠다고 했잖아.”

어-

아- 이야-

와- 아- 와아-

사람이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가 없으면 입으로 말이 안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 거였구나. 몇 초 전에 예쁘게 웃는다고 생각한 거 취소다. 아니다, 그 날 밤의 내가 그냥 바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마음속 한켠에선 아무래도 괜찮지 않냐며 즐거워하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어차피 별로 무겁지도 않은 녀석 하나 뒤에 태운다고 해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게 빠르니 좋지 않냐며 자전거 등교의 이점에 대해 이런저런 근거를 들어가며 진지하게 설득하는 나도 있었다. 최악은 예쁘게 웃는 건 사실이지 않냐고 외치는 나였다. 미칠 지경이었다.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표정 관리가 안 되어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꾹 누르며 눈만 치켜뜨고 물었다.

“몇 달…이면 언제까지.”

“으음.”

츠키시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첫눈 올 때쯤까지?”

도쿄는 미야기보다 훨씬 남쪽이다. 눈이 오려면 최소한 12월, 아니면 해를 넘겨야 할 지도 몰랐다. 대충 꽉 채운 석 달 남짓. 심장이 남아날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지. 겨울에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다 이 비실한 녀석이 감기라도 걸리면? 고민과 고민에 대한 임기응변 같은 답들이 앞을 다투어 뛰쳐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녀석을 보자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대답은 너무 허술하게 튀어나왔다.

“그래.”

긍정의 답을 하자 오히려 빙글거리고 있던 츠키시마가 놀랐다.

“어레.”

“왜 그런 표정이야.”

“뭐가 이렇게 순순해? 아까 뭐 잘못 먹었어?”

“아침부터 시비 걸지 말고 어서 나와.”

베란다에 가서 자전거를 들고 나오니 츠키시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을 나섰다.

앞서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납득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이건 저 녀석이 아침부터 해사하게 웃어대서 넘어간 게 아니다. 그냥 아침 워밍업하는 셈 치는 거다. 심근 강화 운동하는 거다. 그런 거다. 추워지기 전에 같이 독감 백신을 맞으러 가면 괜찮을 거다. 날이 추워지면 아주 칭칭 감고 나가게 할 거다. 그럴 거다. 절대 이건 저 녀석이 웃는 모습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

 

“이야, 오늘 안경 군 힘 빡 주고 왔던데?”

새학기가 시작되고 4학년 선배들 중 졸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부실에서 짐을 정리하면서 I 선배 옆의 캐비닛으로 옮겨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번 학기에도 츠키시마와 형… 형법 무슨 론? 그런 수업을 같이 듣는 I 선배는 그 수업을 듣고 온 날이면 캐비닛 앞에서 꼭 츠키시마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 무슨 소린가 해서 고개만 갸웃거리자 선배는 강의실에 무슨 모델 나타난 줄 알았다고 웃었다.

“말도 마라, 우리 여학우님들에게 둘러싸여서 난리도 아니었어. 교수님까지 한 마디 하셨다니까. 오늘 데이트라도 하냐고 했더니만 아주 어이없다는 것처럼 웃더라. 건방진 녀석. 데이트 복장이 아니라 전투복이라면서 이상한 소리 하던데. 걔 가끔 보면 진짜 이상한 데서 엉뚱해.”

아침의 녀석을 돌이켜보니 평소보다 좀 더 멀끔한 거 같긴 했다. 잘 보지 못 했던 옷을 입었다.

그나저나 전투복? 무슨 소리지. 누구랑 싸우러 가나. 저녁 약속 있어서 늦을 거라는 소리밖에 안 했는데.

 

 

그랬다. 녀석은 늦었다.

10시쯤 라인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늦을 거라는 말도 했는데 괜히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자정 쯤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어디냐고 물었다. 답이 없었다. 읽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누구랑 만나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늘 있던 세미나에서의 저녁 약속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아무 연락도 없이 늦은 적은 없었다.

새벽 1시.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갔지만 도통 받을 생각을 안 했다.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2시. 이미 내가 잠드는 시각은 훌쩍 넘겼다. 몇 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핸드폰이 꺼져버린 건지 신호가 뚝 끊겼다.

안절부절 못하다 시침이 3을 가리킨 순간 참지 못 하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일단 나가서 찾아보고. 학교라든가, 강변이라든가 근처에 가보고. 없으면? 없으면- 다행히 경찰서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급하게 튀어나오느라 식탁 모서리에 허벅지를 찧었다만 아프지도 않았다.

현관 앞 불투명한 유리 미닫이문 앞에 섰을 때 현관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철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려던 손은 굳은 듯 멈춰버렸다. 온몸을 꽉 채우고 있던 혼란과 걱정과 안도감과 화가 뒤섞여서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탁한 감정을 정수리에서부터 부어버린 것처럼 천천히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섣불리 움직이면 들어오는 녀석에게 냅다 화가 섞인 소리부터 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달려들어서 와락 껴안아버릴 것도 같았다. 철컥거리는 쇳소리가 몇 번 미끄러지듯이 들릴 뿐 현관문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화내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다.

미닫이를 밀어 열고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어 열었다.

눈앞의 츠키시마는 잔뜩 늘어져 고개를 가슴께에 푹 숙이고 있었다. 안경은 어디다 던져둔 건지 맨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한쪽 어깨에 기대게 해서 둘러메고 서 있는 건 장신의 남자였다. 일본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머리칼과 눈의 색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야아- 카게야마! 오랜만!”

하이바 리에프.

개인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눠보진 않았지만 3년 내내 합숙에서, 시합에서 마주쳤다. 친화력 좋은 히나타와 많이 붙어 다녔다. 게다가 히나타 못지않게 넉살 좋은 녀석이었다. 히나타에게서 건너오는 네코마 소식에서 졸업하고 진학도, 배구도 하지 않고 무슨 모델 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까지 찰나에 떠올랐다.

커다란 손바닥을 좍 벌려 흔들면서 친근하게 웃는데 그 오른손 검지에 열쇠고리가 걸려 흔들리고 있었다. 공룡모양의 작은 열쇠고리, 츠키시마가 가지고 다니는 우리 집 열쇠다. 츠키시마는 잠든 건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이바가 츠키시마의 한쪽 팔을 당겨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는 츠키시마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화내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 것이 화한 열에 쓸려나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중얼거리듯 인사를 대충 하고는 다가가서 자기 발로 못 서 있고 흘러내리는 츠키시마를 받아 들려는데 하이바는 아주 자연스레 츠키시마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미세하게 물러섰다.

“오늘따라 츳키가 좀 취해서. 데려다주려고 왔어. 츳키 방 어디야?”

하이바는 싱긋 웃으면서 넉살 좋게 어깨부터 현관으로 넣으며 밀고 들어왔다. 그 기세에 주춤거렸더니 요령 좋게 양쪽 발만으로 신발을 벗고는 집으로 들어섰다.

“아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들어선 하이바는 오- 집 좋네- 휘파람을 짧고 가볍게 불면서 식탁에 오른손에 들린 열쇠고리를 던져놓고 한 쪽 어깨에 걸린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아아, 아니야, 밤늦게 실례해서 미안해?”

하이바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미안하다고 말하며 츳키 방은 어느 쪽? 하면서 물어왔다.

바싹 마른 입술을 겨우 떼어 안쪽 방,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츳키 프라이빗하잖아. 이쪽이 별다른 답도 않는데 혼자 잘도 얘기하면서 하이바는 정신을 못 차리는 츠키시마를 데리고 들어섰다. 아, 신발, 하며 어깨에 꽉 둘러멘 츠키시마를 감고 있던 손을 살짝 풀더니 이쪽에서 뭐라 할 틈도 없이 다시 양팔로 들어 안았다. 그리고는 츳키, 집에 다 왔어- 라고 소곤거리면서 척척 녀석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갔다. 머리에서 열이 확확 올라 정신이 없었다. 입을 열면 통제 못 할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이바는 츠키시마를 침대에 조심스레 눕히더니 여전히 신겨져있는 신발을 벗겨내고는 이것 좀 부탁할게- 라며 웃었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도 녹색 눈만큼은 전혀 웃고 있지 않는 게 확연히 보였다. 젠장. 이쪽에서 뭐라 하기 전에 밀고 들어오는 녀석이었다. 츠키시마의 컨버스를 받아들고는 몇 걸음 만에 부엌에 가서는 현관에 던져버렸다. 부리나케 되돌아왔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자식, 뭔가 위험하다. 하이바는 침대에 누워있는 츠키시마 위로 몸을 굽히고 있다 내가 돌아오자 긴 몸을 쭉 일으키고 웃었다.

“인사하고 가려고 했는데 츳키가 정신을 못 차리네. 갈게. 오랜만에 봤는데 실례해서 미안해.”

여전히 미안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말투였다 저 자식의 입에서 꼬박꼬박 튀어나오는 츳키, 란 호칭이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릿속에서 신경줄을 튕겨댔다. 야마구치가 부르는 소리를 3년 동안 들어서 익숙했는데, 분명 보쿠토 씨도 몇 번이나 그렇게 부르며 말하는 걸 들었는데도 하이바의 입에서 나오는 츳키, 소리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츠키시마의 방에서 나오면서 지나치려는 녀석을 붙잡았다.

“너도 취한 거 같은데 물이라도 마셔.”

“응? 아냐, 난 괜찮아.”

“마셔.”

부엌으로 척척 걸어가서 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 건네며 노려봤다. 손사래를 치고 있던 하이바의 순간 눈가가 둥글어졌다 금세 다시 가늘어졌다. 이 자식, 누가 네코마 출신 아니랄까봐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있다. 귀여운 고양이가 아니라 맹수 같은 고양이과라서 문제지. 차가운 손가락으로 컵을 받아든 하이바는 한가득 채운 물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비워버렸다.

“하아~ 이런, 고마워, 폐를 끼쳤네.” 전혀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다.

“오늘, 왜 저렇게 취한 거야?”

“아, 나랑 쿠로오 씨 생일 축하해주겠다고 해서 뭐 이것저것, 겸사겸사해서 다들 모였거든.”

‘다들’ 이라는 건 일전의 보쿠토 씨가 이야기해준 멤버들이겠지. 츠키시마, 하이바, 보쿠토 씨, 아카아시 씨, 그리고 쿠로오 씨.

쿠로오. 그 이름이 등장한 게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학기 시험 기간, 그에게서 연락이 오자 부리나케 튀어나갔던 츠키시마가 떠올랐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는 날 보곤 하이바는 말을 이었다. 저 웃음이 불편하다. 히나타와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는 저런 식으로 웃는 녀석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근데 말이지. 우리 똑똑한 츳키가 쿠로오 씨한테만 좋은 선물을 해준 거 있지. 조금 열받아서 이것저것 함께 마시다 보니까 좀 무리했나보네. 그래도 츳키가 저렇게 술 약한 줄 몰랐어.”

우리, 츳키, 쿠로오, 선물.

하이바의 말은 온갖 곳에 압정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귀에 들어오는 음절 하나하나가 뾰족하게 아팠다.

“선물?”

“응, 아주 근사한 셔츠.” 툴툴거리던 하이바는 손에 들린 빈 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뭐, 나도 결국 늦긴 했지만 좋은 선물 받아냈으니, 그걸로 만족이야.”

무슨 소린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혼잣말인 것처럼 빈 물컵 표면을 따라 손톱으로 긁던 하이바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고는 실실 웃었다.

“본인은 너무 취해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내일 일어나면 선물 고마웠다고 전해줘. 아, 물 땡큐. 그럼 이만 갈게.”

하이바는 처음 봤을 때처럼 기다란 손을 활짝 펼쳐 흔들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그에게 물은 건 직감에서였다.

“쿠로오 씨.”

“응?”

“쿠로오 씨 풀네임이 뭐야?”

“쿠로오 테츠로.”

엉뚱하게 들릴 번한 질문에도 전혀 주저않고 즉답을 했다. 하이바는 잘 자 카게야마~ 자신의 눈꼬리만큼 말꼬리를 높게 올려 날리고는 떠났다.

닫힌 현관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 했다. 손을 들어 천천히 문을 잠갔다. 방까지 가지 못 하고 식탁 앞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집은 조용했다. 머릿속이 술렁거렸다.

아주 근사한 셔츠?

 

 

개강하고 얼마지 않아 연습 후 부실에서 떠들던 배구부 선배들에게서 지난 대학 리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겨울 대학 리그에서 우승하고 난 이후 학장님에게 초대를 받아 다들 정장 차림으로 학장실에 가서 이런저런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선배들은 어디서건 필요할 수 있으니 정장까진 아니더라도 포멀한 복장 하나쯤은 갖추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 주말, 주저하다 츠키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때, 츠키시마가 골라준 옷을 탈의실에 들어가서 입어보고 나오다 그 말을 분명 들었다.

‘셔츠 소매에 T. K. 라고 넣어주세요.’

문을 열고 나오다 눈이 마주치자 츠키시마는 눈썹을 좁혔다가 점원에게 뭐라 소근거리며 카운터에 놓인 메모지에 펜으로 끄적이고는 뻘쭘하게 선 나에게 온갖 핀잔을 날렸다.

툴툴거리면서 따라와준 츠키시마의 손에도 돌아오는 길에는 쇼핑백이 두어개 들려 있었다.

 

 

T. K.

Tsukishima Kei 라고 생각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오늘까지도 츠키시마가 그 브랜드의 새 옷을 입은 적이 없다는 걸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늦은 시각에도 뇌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퍼즐의 조각들을 맞추듯 정보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동안 빠져있던 마지막 조각을 하이바 리에프가 무심하게 던져놓고 갔다.

생일.

선물.

근사한 셔츠.

쿠로오 테츠로.

테츠로, 쿠로오.

ㅌ.ㅋ.

T. K.

그 순간 적막을 뚫고 츠키시마의 방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츠키시마가 뭔가 불편한지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괜찮아?”

“ㅁ…무…”

잠깐만, 낮게 답하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컵에 물을 따르려다 아예 물병째로 함께 들고 돌아왔다. 츠키시마의 어깨 뒤로 팔을 넣어 살짝만 들어올려 물컵을 입에 가져다주었다. 천천히 조금씩 마시고 입술로 쭉 밀어낸 츠키시마는 후우- 숨을 쉬고는 그대로 다시 누웠다.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 츠키시마의 어깨 뒤에서 밀려 목 아래 깔린 팔을 조심스레 빼냈다. 몇 번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더니만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잠시 지켜보다 잠든 건가 싶어 바닥에 내려둔 컵과 물병을 침대 머리맡 근처의 바닥으로 옮기고는 그 옆에 잠시 앉았다.

“ㅋ…카게…ㅇ.”

잠든 줄 알았던 츠키시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흠칫 놀랐다가 침대에 조금 가깝게 붙어 앉았다.

“왜- 뭐 필요해?”

“으웅….”

츠키시마는 무언가 불편한지 꿈틀거리다 고개를 살짝 모로 돌려 이쪽을 향했다.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이는데 뭐라 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귀를 츠키시마의 입가에 바싹 가져다대었다.

“응…늦엇… 미…안….”

그러고도 말이 되지 못 한 소리를 입가에서 웅얼거렸다. 얼마지 않아 방 안에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남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나 앉았다.

눈높이 살짝 아래에 츠키시마의 얼굴이 있었다. 베개에 파묻은 한쪽 볼이 눌려 살짝 통통하게 올라와있었다. 그래, 나 진짜 이 녀석 열심히 먹였다. 아침은 물론이거니와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파묻혀버리는 녀석을 끌고 학식에 가서 점심도 먹고, 오후 훈련하다가도 저녁 시간이면 학교 어딘가에 숨어있는 애를 닦달해서 저녁도 같이 먹었다.

가라앉은 호흡이 나직하게 이어지며 간헐적으로 눈가가 움찔거렸다. 긴 속눈썹들이 파라락 모여들었다 펼쳐졌다. 손가락으로 허공에서 속눈썹을 세기 시작했다. 50여개를 넘겼나 싶을 때 닫힌 눈꺼풀이 또 꿈틀거리면서 세던 속눈썹을 놓쳐버렸다. 허공에서 목표를 잃은 손가락으로 츠키시마의 얼굴선을 따라 그렸다. 말끔한 이마, 짧고 얇은 눈썹, 아래 있을 눈동자까지도 그릴 수 있는 눈, 반듯한 코, 작고 비죽거리는 입. 손가락은 다시 헤맸다. 갈 곳을 잃었다.

뭐하는 짓이지.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술렁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아차리는 순간은 찰나다.

그리고 알고 나면 몰랐던 때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질문.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미뤄두었던 질문이 다시 찾아들었다.








10.

 


 

츠키시마는 침대에서 도통 일어나질 못 했다. 하이바 리에프에게 매달려 들어온 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 했다. 이불 속에 계속 파고들어가는 녀석을 곁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이불을 잡아끌 힘이 없었다. 아니, 반대다. 힘이 넘쳐서 오히려 무서웠다. 하이바가 너한테 결국 선물 받았대. 고맙대. 무슨 선물이길래. 쿠로오 씨한테는 근사한 셔츠를 선물로 줬다며. 그 때 샀던 그건가 보지. 쿠로오 씨랑 저번에 만난 날은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어. 그 사람이 연락하면 열심히 답하더라. 너 쿠로오 씨랑 무슨 사이야. 학교 선배도 아니잖아. 의식의 수면 위로 익사체처럼 둥둥 떠오른 말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목구멍 뒤로 삼켰다. 억지로 삼킨 말들이 한참을 배 안쪽에서 어둡게 소용돌이쳤다.

 

기온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겨울 리그가 가까워졌다.

쉴 새 없이 달리고, 뛰어오르고, 손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지 않는 시간엔 츠키시마의 생각을 했다. 한 게 아니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멈추려고 했지만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잠시 숨을 돌릴 때면 여지없이 츠키시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아냥거리는 얼굴, 짧고 불퉁한 눈썹과 입술, 꽃이 지는 풍경 같던 미소, 당황할 때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숨죽여 발갛게 타오르는 귀 끝, 허리춤을 잡아오는 가늘고 긴 손가락, 홀로 유쾌하게 웃던 모습, 뜨거운 열에 끊이지 않던 마른 기침소리, 꼭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다가 오물거리며 먹던 케이크 위의 딸기, 살아 움직이는 검은 덩어리 같은 물을 바라보던 가라앉은 눈동자. 끝도 없었다. 내 안에 이렇게나 많은 츠키시마의 기억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하나씩 하나씩, 이런 나도 있다며 소리쳐 존재를 증명하듯 떠올랐다.

그리고 어김없이 질문이 따라왔다. 어떻게 할 건가. 어느새 육중하고 거대하게 자라난 질문은 길게 뻗은 여러 줄기의 가지에 선택지를 잘 익은 열매 마냥 주렁주렁 달고 나타났다.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고를 수 없었다. 외면할 때마다 선택지들은 점점 무거워져 질문의 가지를 흐드러지게 휘었다. 이러다간 내 의지로 선택하기 전에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먼저 떨어지는 녀석이 답이 되어버릴 거란 불길한 예감이 휘돌았지만 그럼에도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 했다.

츠키시마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배구를 할 때뿐이었다. 더 뛰어오르고 손을 뻗는 것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늦은 시각까지 몸을 혹사시키고 돌아온 집은 조용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서 노트북 화면에서 나오는 빛만이 어두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 녀석은 거실에 뭘 다 이렇게 풀어 헤쳐 놓은 거야. 집에 돌아오면 방에 꼭 처박혀있던 녀석이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거실에 나와 지낸다. 거실 불을 켜고 돌아서는데 눈 위로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다시 바라본 모니터에는 갖가지 집의 구조도가 나열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다가가 스크롤을 움직여보았다. H시의 1LDK 구조, 위치, 대략적인 시세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이런 건 왜 찾아보고 있는 거지.

화장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흠칫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오는 녀석과 마주칠 때쯤엔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막 들어온 듯이 식탁 옆을 지나쳤다.

“왔네? 들어오는 거 못 들었는데.”

“으응.”

당황을 감추며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통수에 츠키시마의 시선이 날아와 박히는 걸 느꼈지만 문을 닫아버렸다. 닫은 문에 머리를 기대고 섰다. 어깨에 매고 있던 스포츠백이 갑자기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어깨를 늘어뜨리자 가방은 바닥으로 쿵 내려앉았다. 가만히 서서 호흡을 골랐다. 아스라이 먼 감으로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먼 뒤편에서 들리던 슬리퍼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내 방문 앞을 지나쳐 오른편으로 들어갔다. 문이 복도 모서리에 맞닿아 있다시피한 구조 때문인지 녀석이 미닫이문을 밀어 닫는 것이 머리를 대고 있는 곳에서부터 진동처럼 전해져왔다. 피곤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문에 기댄 채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뭐하는 걸까. 보면 피곤하고, 안 보면 보고 싶다.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잘못 발을 들이민 것 같았다.

‘나 케인데….’ 웅얼거리는 소리가 문 저편에서 들려왔다. ‘응. … 응.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응.’

누군가와 하는 전화. 이 집 새삼 방음이 안 좋다는 걸 알았다. 눈을 뜬 녀석과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늘 아웅다웅하는 시간들이라 조용할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카게야마?’ 땅으로 꺼졌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내 얘기?

‘카게… … 내년이면 합숙소… 대표도… 아냐…,’ 방음 안 좋다는 거 무른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질 않는다.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아니… 괜찮… 내가 알아서… 응… 응….’

그리고 조용해졌다. 당장 튀어나가서 무슨 얘기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녀석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 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일해라 뇌. 1DK, 침실이 하나 있는 집. 이 집이 아닌, 다른 집. 카게야마, 내 이름, 합숙소. 내가 합숙소에. 대표, 아마도 국가대표.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코치님에게서 넌지시 들었다. 저 녀석은 누구에게 들은 거지. I 선배인가.

팽팽 돌아가면서 열이 펄펄 날 지경이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츠키시마는 혼자 살 준비를 말 그대로 ‘혼자’ 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대한 질문 나무가 다시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 자, 어서 어떤 열매든 골라서 따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 썩어서 떨어져버릴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이 질문 나무 자체가 쓸모없어질 지도 몰라.

 

함께 있고 싶고, 같이 식사를 하고 싶고, 별 의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무 말없이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 깊은 밤의 흘러가는 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그 영화를 보며 너는 눈물을 흘렸을까. 그 눈에 비친 풍경은 대체 나와는 뭐가 달랐을까.

허공에서 더듬을 수밖에 없었던 이목구비를 차근차근 만지며 그려보고 싶다. 발갛게 변한 얇은 피부가 정말 뜨끈뜨끈할까 궁금하다. 너의 곱슬한 머리카락은 만져보면 사락거릴까. 손가락을 넣어 빗어보고 싶다.

술을 마시면 유독 실없이 웃는 얼굴을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고 싶고 잠에 취해 꾸벅거릴 때 널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고요하게 곁에 있고 싶고 낮은 숨소리에 함께 잠들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 싶다.

동시에 말하고 싶지 않았다.

츠키시마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만큼, 보고 싶었다.

녀석을 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아침과 저녁의 평온한 인사를 계속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질문은 그저 무거워만지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그 모든 것의 시작 지점은,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거였다. 그것마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차게 식어버린 머릿속에서 심장이 덜컹거렸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났다. 새벽에 지끈거리는 머리로 눈을 떴는데 어쩐지 사위가 밝았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파르스름한 새벽빛에 익숙해졌는데 평소보다 밝았다. 늦잠을 잔 걸까 시계를 확인해봤지만 늘 일어나던 시각이었다. 무심코 바라본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12월, 도쿄에 눈이 내렸다. 기사에서는 30여년 만에 12월에 내린 첫눈이라고 했다.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커다란 창과 베란다 문 밖에서는 큼지막한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자전거 안장이 베란다 한편에서 날아 들어온 눈 몇 송이에 슬몃 젖어있었다. 녀석이 등 뒤에 앉아 꿈지럭거리는 아침의 경사길도 끝이었다.

이런 식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면 자연소멸하게 되는 걸까,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매일 배구를 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공을 올리고 기절하듯 잠드는 날들로 달력을 가득 채우면- 그러면 약속된 기한의 끝이 온 것처럼 허락도 없이 쳐들어오는 츠키시마의 생각이 언젠가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될까.

 

*

 

올해의 마지막 합숙은 엉망진창이었다. 심지어 해산 직전 감독님께 단독으로 불려가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답했지만 감독님은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이 아니다’고 하셨다. 더 이상 길게 말 안 한다. 중요한 때니까. 해 바뀌면 마음 단단히 먹고 와. 감독님의 굳은 얼굴을 보고 네, 대답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선배들은 감독님과 독대하고 돌아온 날 보고 웃으며 내 어깨를 한 번씩 쳐주었다. 부주장이 저 녀석들 한창 말썽 피우던 때 비하면 넌 진짜 양호한 거야, 인상 펴, 하며 북돋아주었다. 부주장의 손가락 끝에 지적당한 페어는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했다.

“아, 이브날 점심에 해산하는 합숙이라니, 이러니까 코치님이 계속 싱글인 거에요!”

“뭐, 뭐라는 거야, 이 녀석!”

“어- 대충 찍었는데 맞았나.”

“야, 안 되겠어, 너네는 정신훈련을 더 받고 가.”

“감독님이 해산이라고 했는데 그런 게 어딨습니까!?”

“하하, 코치님, 사랑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선배들이 내 뒤로 다가와서는 한마디씩 보탰다. 그래, 저 녀석들에 비하면, 넌 정말 괜찮아. 부디 저렇게 자라지는 말아다오. 저런 녀석들은 이미 우리 팀에 충분해.

나는 나름 숨긴다고 했던 건데도 여러모로 티가 나서 선배들에게 폐를 끼쳤단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아무 말 없이 열심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선배들이 머리를 잔뜩 헤집어주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학교 후문 쪽으로 다 같이 나가게 되었다. 상점가를 끼고 있는 모노레일 역 근처는 아직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온통 작은 불빛들로 반짝였다.

“맞다! 케이크! 여자친구가 사오라고 했어어어어!”

뒤에서 걸어오던 O 선배가 쏜살같이 베이커리 앞으로 달려갔다. 젠장, 저런 자식이 여자친구가 있다니, 툴툴거리는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케이크.

그 녀석 케이크 좋아하지, 딸기 잔뜩 올라간 거. 부드럽고 달달한 거.

 

*

 

해가 어스름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시간, 츠키시마는 거실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식탁에 올려놓으려던 상자를 그냥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선배들이 하나씩 사길래. 크리스마스 케이크라고 많이 팔던데.”

츠키시마는 흐응, 거리며 포장을 살짝 풀어보더니 말했다.

“뷔슈드노엘이 아닌데.”

도통 따라할 수조차 없는 발음으로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어가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하고 돌아서자 츠키시마가 손으로 허공에 뭔가 동그란 원통 같은 모양을 그려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보통 통나무처럼 생긴 거잖아.”

“케이크를 무슨 통나무로 만들어.”

이마를 짚으며 끄응-, 이상한 소리를 내던 츠키시마는 핸드폰으로 무언가 검색해서는 나에게 들이밀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까맣게 말린 롤케이크 같은 것들이 있었다. 녀석은 손가락으로 하나를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이렇게, 통나무 모양으로 생긴 걸 보통 먹는다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츠키시마는 아는 게 대체 뭐야, 투덜거렸다. 오히려 이런 걸 다 아는 녀석이 신기하다. 크리스마스에 먹는 케이크가 어떤 모양인지는 몰라도 저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가 뭔지는 안다. 덕분에 상점가의 케이크 팔 만한 가게는 몇 군데나 돌아다녔다.

“너 딸기 좋아하는 건 알지.”

시야 끝에 걸린 녀석은 투덜거리고 있다 분명 멈칫했다. 그리고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있는 뾰족한 귀 끝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당황하면 네 귀가 불타오른다는 것도 안다. 뱃속 깊은 곳에서 간지러운 웃음이 솟았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 보면서 힘든 거보다 보면서 피곤하고 즐거운 게 역시 훨씬 낫다.

“츠키ㅅ…,” 녀석을 부르는 찰나, 츠키시마는 벌떡 일어나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뭐야, 왜 저러는 거야. 내가 또 츠키시마의 그 많고 많은, 알쏭달쏭한 지뢰를 건드린 건가 싶었다. 지금은 안 돼, 기껏 마음을 먹었는데. 급한 마음에 따라 들어가려다 방에서 다시 툭 튀어나오는 녀석과 부딪칠 뻔 했다.

“깜짝이야.”

기겁하는 녀석을 보고 덩달아 놀라 뒷걸음질쳤다. 별 희한한 거 다 보겠다는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 츠키시마는 손에 들고 있던 걸 떠안기듯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뭐라 말도 없이 다시 나를 지나쳐 식탁으로 가 의자에 삐뚜름하게 걸터앉았다. 그 뒤를 다시 졸졸 따라갔다. 품 안에 들어온 건 얇은 쇼핑백이었다.

“이건 뭐야?”

“너 가져.”

“뭔데.”

녀석은 내 물음에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매만졌다. 짧은 머리카락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헝클어졌다.

“너 합숙 기간 동안에 생일 지났잖아. 가져.”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안경테에 가린 녀석의 볼은 살짝 발갛게 변했다. 야아, 이건 반칙이다. 큰 소리로 웃고 싶어졌다. 또 줄줄 울고 싶어졌다. 위험하다.

쇼핑백 안에서 나온 건 각이 잡힌 와이셔츠였다. 이거- 가을이 지나가던 무렵 함께 쇼핑 갔을 때 들어갔던 매장 브랜드 중 하나였다. 천천히 겉비닐을 뜯어냈다. 안에 든 와이셔츠를 잡아 빼서 펼쳐보았다. 옅은 푸른빛이 묘하게 도는 와이셔츠였다.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오른쪽 소매의 옆면에 무언가 실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오른쪽 소매를 집어들었는데 거기에 붙어있는 건 실오라기가 아니었다.

남색 실로 수놓은 필기체의 J… 아니다, J가 아니라,

T.

T. K.

웃고 싶은 기분도, 울고 싶은 기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뱃속을 간지럽히던 감각도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왼쪽 새끼손가락이 엄청나게 저려왔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손등을 타고 따끔거렸다.

이거 어쩌지. 이 녀석 당황하겠네. 쿠로오 씨 주려던 게 나한테 왔나보네. 쿠로오 씨 생일은 이미 한 달이나 넘게 지났으니 이제 와서 선물이 바뀌었다고 말하기도 난감하겠네. 그러면 그냥 내가 받아야 하나. 어쩌지. 머릿속은 새하얀 우윳빛으로 빈틈도 없이 꽉꽉 차버렸는데 연극 무대의 장막 뒤에서 남 일인 양 독백하는 내가 있었다. 현실이란 감각이 아득해질 정도로 멍해졌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소매를 잡고 있는 손이 덩달아 떨렸다. 문득 이 쪽을 흘깃 보는 츠키시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흠- 목을 비우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이거 바뀌었나 보네.”

턱을 괴고서 딴청을 피우고 있던 츠키시마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무슨 소리야? 녀석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동그랗게 변했다.

“쿠로오 씨 주려고 했던 거잖아. 바뀐 거 같은데.”

아,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래 당황할 만하겠지. 츠키시마는 입을 떡 벌리고는 다물지도 못 하고 있었다. 그 벌어진 입 사이로 한참 만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 하는 거야?”

“여기 봐, 쿠로오 씨 선물이랑 바뀐 거 아냐?”

잡고 있던 오른쪽 소매 부분을 츠키시마의 앞에 보여줬다. 츠키시마는 내가 보여준 소매를 한 번 보더니 입매를 굳혔다. 민망하려나. 좀 더 조심해서 말해야 했나. 그런데 어쩌지. 나도 손목께가 따끔거려서 너무 아프다. 츠키시마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괜찮다고, 그냥 잘 입겠다고?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는 단어들을 이리저리 모아가며 뭐라고 말해야 할 지 겨우 고민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벼락이 친 것처럼 소리가 터졌다.

“그거 네 거라고, 이 자식아!”

어?

“젠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 쿠로오 씨 이름이 왜 나와.”

어어?

“갖기 싫으면 내놔. 아니다, 이미 새겨놓은 거 때문에 내가 입지도 못 하겠네. 하! 맘에 안 들면 그냥 버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어어어?

“알파벳 못 읽어? 네 이름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 눈이 두 개씩이나 달려있는데 코앞에 있는 것도 못 보면 대체 왜 달고 다녀? 봐-! 똑바로 보라고!”

양손으로 머리를 잔뜩 헤집던 츠키시마는 내 손에 들려있던 셔츠를 잡아 뺏듯이 들었다. 마주 잡고 있다간 옷이 찢어질 기세였다. 엉겁결에 놓쳐버린 와이셔츠를 두 손에 들고는 츠키시마는 펄럭거리면서 소매를 잡아 눈앞에 들이밀었다. 내가 보았던 오른쪽 소매 옆면에

T. K.

그리고 왼쪽 소매 부분을 안쪽으로 돌려서

T. Kageyama.

“이거 읽을 줄 몰라? 티. 카게야마. 너 네 이름 몰라?”

그리고는 그대로 내 머리 위에다 던져버렸다. 아주 강속구로.

“하- 진짜 배구 말고는 전혀 아는 게 없다지만 이 정도로 무식할 줄이야. 정말 하루하루 놀라움의 연속이네. 대체 얼마만큼 더 놀라게 할 작정인지 미리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저 같은 소시민은 계속 이런 식이다간 충격에 제정신이 남아나질 않겠네요.”

츠키시마의 비아냥이 1단계, 2단계를 거쳐 3단계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와 목소리에 화가 잔뜩 담겨있었다. 머리 위를 뒤덮은 셔츠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표정일지 훤했다. 천천히 손을 올려 머리를 뒤덮고 있는 옅은 푸른색이 들어간 와이셔츠를 끌어내렸다. 앞에 있는 츠키시마는 잔뜩 열이 올랐다.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대답 좀 해주시지? 아! 이 미천한 소시민에겐 대꾸해줄 가치도 없나보지?”

“이거, 뭐라고?”

떨리는 손으로 오돌토돌하게 박힌 남색 실을 따라 손가락을 누르며 물었다.

“토비오! 토비오의 T.! 카게야마의 K.! 필기체는 못 읽냐?! 이… 멍…멍… 멍청아!”

토비오의 T. 카게야마의 K.

츠키시마가 부르는 내 이름은 그 누가 불러준 것과도 달랐다. 엄마도, 아빠도, 그 누구도 내 이름을 저렇게 불러주지 못 했다. 명징한 소리. 날카롭고 예리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창보다도 뾰족한 소리가 되어 가슴을 찔러버렸다.

 

인식은 한 순간, 고민은 길고, 다시 결정은 찰나.

나는 열매를 땄다.

 

“츠키시마,”

“아 왜!”

“케이.”

흠칫 놀란 녀석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조각상 같네 이렇게 보니까.

푸흐흐- 바람 새는 웃음이 나와 버렸다. 이 녀석 때문에 내 감정은 온통 엉망진창이다. 웃고 싶으면서도 울고 싶고, 실망하다가도 기뻐지고, 화가 났다가도 행복해진다.

굳어있던 녀석은 화를 내서 벌겋게 달아있는 얼굴로 다시 입가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사람 놀,”

“고마워.” 다시 뭐라고 폭발해버리기 전에 선수를 쳐버렸다. 입을 열려던 녀석은 또다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잘 입을게. 진짜 고마워.”

“너 대체 뭐하자는 거야?”

츠키시마는 짧은 제 앞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잡아당겼다. 여전히 평소보다 높은 텐션이긴 했지만 입가가 우물쭈물하는 모양새다. 이런 녀석을 보고 있자니 또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걸까. 웃으며 얄미운 말들로 내 페이스를 다 무너뜨리는 건 늘 이 녀석의 몫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있는 대로 화를 내며 달려드는 건 내 역할이었다. 어느샌가 우리 둘은 비슷하게도 닮아있었고, 또 달라져있었다.

지난 겨울의 끝 무렵, 엔노시타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같이 지내다 보면 장단점을 서로 채워줄 수 있을 거 같아서.’

장단점을 채워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는 뭐 하나 쉽게 내어놓지 않는 이 녀석이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고 싶어 견디지 못 하게 되었을 뿐이다. 너무나도 목마르게 알고 싶어진 만큼, 내 것을 내어놓기가 두려워졌다. 너도 혹시 그런 걸까. 그래서 그렇게 뭐 하나, 있는 그대로 쉽게 얘기하지 못 하는 걸까. 늘 오만한 눈으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네가 알고 보니 겁이 많았던 것뿐일까. 알고 싶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첫 번째.

“야, 나 생일선물 준 김에 크리스마스 선물도 줘.”

제왕 뻔뻔하네 정말, 폭격처럼 쏟아낸 화의 총량이 다 했는지 짐짓 한숨 같은 소리였다.

식탁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츠키시마의 앞에 놓고 앉았다. 이제야 눈높이가 맞았다. 말갛고 동그란 눈이 앞에 있었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내년에도 나랑 같이 살자.”

츠키시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제야 조금씩 알 거 같다. 표정은 바뀌지 않지만 이 녀석의 눈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나 국가대표 어떻게 될지 몰라. 물론 되고 싶고,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되든, 되지 않든, 합숙소는 꼭 필요한 훈련할 때 아니면 안 들어갈 거야. 여기서 계속 살 거야. 집을 비우는 시간이 올해보다야 길어지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랑 같이 살자.”

하나하나 천천히 츠키시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 하나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말 하나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말 하나에 눈이 동그래지다가 말 하나에 눈가가 샐쭉해졌다. 말이 끝나자 아래로 내리까는 눈가에, 속눈썹에, 안경 유리에 빛이 일렁였다. 잠시 말이 없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츠키시마가 눈을 들어 다시 나를 보았다.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왜?”

 

너도 나를 궁금해 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알고 싶어 하는 만큼은 안 되더라도, 나를 궁금해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관찰하고 싶어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내 옆에 있으려고 하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신경 썼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생각하는 것만큼 너도 나를 생각하면 좋겠다.

츠키시마가 내 이름을 말했을 때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Go 사인이었다. 달을 향해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로켓과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 로켓이 달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까.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나는 그저 부족하게나마 정성스레 만든 걸 내보일 수밖에 없다.

 

“내가,”

숨에 실어 말을 내보낸다.

“널,”

하나하나 천천히 센다.

“좋아하니까.”

눈을 절대 피하지 않아.

“같이 있고 싶어.”

 

웃고 싶고, 울고 싶고, 소리치고 싶고, 속삭이고 싶고.

알고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인간인지.

 

눈앞에서 새빨갛게 타오르는 얼굴을 보고 나는 그만 웃으면서 울고 말았다. 인생 최악이면서도 최고의 순간이었다.








동거인 House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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