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카아시 씨에게 그 사람은 어떻게 남아있습니까. 저에게 그는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때로는 아침의 슬리퍼였고, 때로는 오후의 커피였죠.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고, 가끔은 앞서 나가기도 했어요. 사람은 발 딛는 땅이 꺼질지도 모른단 생각이나, 숨 쉬는 공기가 사라진다는 걱정을 하면서 살진 않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습관은 남은 채, 그라는 실...
바닷물이 다 들어오지 못하고 발치까지 다가왔다가 대양의 부름에 다시 끌려가고 마는 검은 흔적을 내려다보며 츠키시마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미세한 모래 알갱이 위로 투명하고 하얀 포말이 이번에야말로 하얀 발가락 끝을 간지럽힐 듯 밀려들어 오다가 다시 멀어진다. 물거품이 밀려 나간 자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문득 짙어졌다. 새삼스레 제 그림자 위로 섞이는 ...
츳키. 그가 기뻤다. 솔직하게 말해줘. 그가 슬펐다. 츳키. 그가 웃었다. 좋아해. 그가 말했다. …케이. 그가 있었다. 사랑해. 이건 꿈이다. 그래서 손가락 마디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꿈이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다. 이건 기억이다. 그의 울 것 같은 얼굴도, 하지만 끝까지 끌어올리던 입가도, 빠르게 부풀어 오를지언정 결코 흘러내리지 않던 그의...
눈을 감았던가. 뜨고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츠키시마는 눈을 깜빡였다. 말라서 뻑뻑하게 느껴질 정도의 눈동자 위로 때 이른 새벽이 쏟아져 내렸다. 카게야마가 새벽의 얼굴을 하고 밤을 찢으며 나타났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낯선 시공간에서 부유하는 느낌이 다시 찾아들었다. 이건 주마등의 연장선인가. 다만, 부여 잡힌 손목의 아...
“가을밤은 깊어가는데 옆구리가 시리다.” 잠언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리에프는 처량함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긴 팔다리를 꼬깃꼬깃 접어 올려 제 몸을 끌어안은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2미터 가까운 청년이 구현하는 처량함은 츠키시마 케이에게는 익숙했다. 츠키시마가 하이바 리에프를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처량 모드 리에프는 ...
마스터, 당신 생각 이상으로 이 사람은 멍청이인가 봐요. 밤과 새벽의 경계 위에서, 지상과 지하의 경계 위에서 츠키시마는 멍하게 생각했다. 지하에서부터 계단을 걸어 올라간 츠키시마가 마주친 사람은 계단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의 눈썹이 휘어져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보며 츠키시마는 미간을 좁혔다. 사람의 밑바닥은 ...
검은 창 위에서 커서만 깜빡거렸다. 알록달록한 문자열들이 나열되다 멈춰선 지 이미 오래다. 츠키시마는 굳은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다 의자를 드륵 밀었다. 의자는 미끄러지며 반쯤 돌아갔다. 등을 적시던 오후의 햇볕이 잔잔히 발치로 부서져 내렸다. 발등을 간지럽히는 햇빛을 내려다보다 츠키시마는 시선을 들었다. 빈 소파 위로 먼지가 부유하고 있었다. 의자의 등받이...
어쩌자고. 이 지경이 됐을까. 해가 안녕을 고하는 시간, 츠키시마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딱 봐도 일에 찌든 것 같은 길 가는 성인을 붙잡고 물어보라. 개중 몇 명이나 과거를 제대로 떠올릴 수 있겠나. 대부분은 시간이 덧칠하고 인간의 나약한 기억력이 제멋대로 채색한 왜곡된 상을 추억이랍시고 우수에 젖은 얼굴로 떠올리는 것뿐이다. 대부분은 현재에 지쳐서,...
잠에서 깬다는 건 이상하다. 존재하지 않던 의식이 갑자기 급부상한다. On과 Off, 급격한 상태 전환의 후유증처럼, 츠키시마는 잠에서 깰 때마다 늘 미약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츠키시마는 잠에서 깼다. 눈을 뜨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꺼져있던 형광등에 불이 켜지기 전에 깜빡이는 것처럼, 온전한 의식 이전에 거의 본능에 가까운 낯선 의심이 찾아들었다. 무언...
그는 이상한 곳에 떨어진 나비 같았다. 날개가 젖어 말리기 위해 내려앉은 곳에서 그대로 날개 어딘가 찢겨 나가 발이 묶여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노란 날개의 잔해가 때때로 그의 옅은 머리카락이나 마른 등 뒤로 스쳤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했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는 이국의 언어로 가느다랗게 노래했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는 읊조림이었다. 성인 남성...
정적에 숨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아니다. 이 정적은 공기가 사라져서. 그러니까, 소리는 음의 파동인데, 그 파동을 전달하는 매개인 공기가 사라져서…. 그러니까, 지금 숨이 막히는 것도 다 공기가 사라져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엉뚱하게도 츠키시마가 떠올린 건 옛날 옛적에 배운 기본 물리의 지식이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정보가 정신없이...
“괜찮냐.” “네 눈엔 지금 이게 괜찮아 보임?” “…아니.” 건조하게 잔뜩 갈라진 목소리여도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가득했다. 뭐라 더 할 말은 없었다. 내 잘못인 것 같으니까. 어쩌다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입학 때부터 우리가 싸우는 이유야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서 심각한 것까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도 계절이 한 바퀴 돌면서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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