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츠키시마 씨!” - “츳키 씨!” - “그럼 케이 씨?” - “츳키!” - “케이.” 놀랍도록 빠르게 호칭이 다양해지면서 길이가 점차 짧아졌다. 하루가 다르게 허물없이 바뀌는 호칭에 츠키시마가 질겁하며 리에프를 매섭게 타박해도 그는 5초 정도 시무룩해질 뿐이었다. 츠키시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시간이 지나가면 이미 리에프는 회복이 끝난 상태였다. 이 ...
“아,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적극적 사랑을 이루는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강사는 순차적으로 네 개의 단어를 큼지막한 글씨로 칠판에 써 내려갔다. 관심 Care 책임 Responsibility 지식 Knowledge 존중 Respect 수강신청 전날에도 불러낸 술고래 웬수들을 원망해봤자 인기 강좌의 신청 인원이 다 찬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밤은 대개 고요하다. 덕분에 빛과 소리가 살아난다. 유일한 예외가 봄이다. 봄밤은 그 자체로 술렁거리는 것 같다. 너울지는 술렁임이 계속 귓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츠키시마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 떼어낼 수도 없는 그런 밤. 첫 만남은 그런 밤이었다. 하나, 밤이 술렁인다 좋은 말로 하면 친화력이 좋고 나쁜 ...
따뜻했다. 공기가 따뜻하고,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도 서늘한 느낌이 없다. 약속도 없고, 딱히 일정도 없는 나른한 날이었다. 봄방학에도 중간중간 잡힌 실습 때문에 미야기에 오래 못 있고 일찍 내려와야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혼자 나른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다. 느지막이 일어나 옷장 정리를 하고 방 청소를 대강 하고 나니 정오가 지났다. 어제 사두었던 ...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갔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매 순간 원하는 것을 그토록 거리낌 없이 요구할 수 있을까요.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도 자라면서 몇 번이고 그 믿음을 배신당하며 어른이 되겠지요. 오늘의 노을은 유독 붉습니다. 타는 노을이라는 말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불타는 ...
엘이 아침부터 산책을 졸랐다. 잠이 부족한 아카아시가 모르는 척해보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늘 그렇듯 진 쪽은 아카아시였다. 그래, 그래, 가자. 귀신같이 말을 알아듣고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안겨들었다.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몸이 휘청이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가 처음 데려왔을 땐 양손 안에 폭 잡힐 정도로 작은 강아지였는데. 동물보호소요? 동물에는...
마크가 웃으며 인사했다. 이곳에 머문 지 일주일 째. 매일 그는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저 고개만 까딱이는 쌀쌀맞은 얼굴에도 다정한 인사를 잊지 않고 건네는 건 서비스업 종사자의 몸에 밴 직업 정신일까, 아니면 그의 타고난 성격일까. 이곳의 사람들이 잔잔히 웃고 다니는 걸 보면 묘하다. 저 사람에겐 무슨 기쁜 일이 있을까. 무엇이 저리 즐거울까. 그도 웃고...
우편함에 꽂힌 편지를 발견한 것은 편지가 도착하고도 며칠 뒤의 일이었다. 그가 떠난 지 4개월 만에 온 한 장의 편지에 담긴 혼란스러움은 이후의 연락을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카아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봉투 한 쪽에 찍힌 소인을 보고 그가 잘 있기를 바라며 매일같이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읽고 넣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단 하나...
아카아시 씨, 제가 가진 주소가 맞는다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겠죠. 그렇지 않다면 이 편지는 엉뚱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거나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합니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잊히는 것도, 사실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이걸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다시 펜을 들게 되리라고는 솔직히 예상하...
1. 일찌감치 점심을 해치웠다. 후식까지 배불리 먹고 나니 금세 노곤해졌다. 바깥 공기는 차고 교실은 뜨끈했다. 오래 묵은 커튼의 먼지가 겨울이라 더욱 환한 햇빛 속에서 부유했다. 학생들도 다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가을 학기 마지막 무렵 특유의 붕 떠 있는 느낌. 점심시간을 몇 분 남겨놓지 않은 시각, 빈 자리들이 듬성듬성 있는 교실의 한산한 분위기 속...
겨울의 막바지, 홀로 비행기를 탔다. 패스를 사서 기차를 탔다. 마음 내키는 곳에서 내리고 다시 기차를 탔다. 파란 호수가 유독 차가워 보여 내렸다. 역에 정차하기 직전 눈에 들어온 목장의 커다란 소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내렸다. 갑자기 동물의 커다랗고 말간 눈이 보고 싶었다. 사유지여서 소는커녕 목장의 울타리조차 보지 못 했다. 멋진 폭포를 본 것 같아...
은퇴, 그리고 휴식기. 듣기엔 그럴듯한 말이지만, 실상은 썩어 문드러진 밭과도 같았다.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함께 했던 팀메이트들은 이미 다 현역에서 물러나고 후배들과도 오래 뛰었다. 흔한 부상 한번 없이 완벽한 몸 관리.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매번 발탁되었던 국가 대표. 친정팀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 30대까지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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